2013.02.15_집단적 상상력의 실패?
2008년 11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경제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런던 경제대학을 방문했다. 당시 전세계를 삼켜버린 금융위기에 관해 루이스 가리카노 교수가 발표를 하고 난 후 여왕이 물었다.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을 못했지요?"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모든 사람이 묻고 싶은 말을 여왕폐하께서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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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의 질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영국 아카데미는 2009년 6월 17일 학계, 금융계, 정부 부처 등에서 최고로 꼽히는 경제학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다. 이 회의 결과를 정리한 편지는 2009년 7월 22일 여왕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는 런던 경제대학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 팀 베슬리와 영국 정부의 역사에 대한 권위자 피터 헤네시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편지에서 베슬리와 헤네시 교수는 "경제학자들 개개인은 유능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일은 잘 해내고들 있었지만 금융위기 직전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또 "영국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집단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시스템 전체에 끼치는 리스크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에 실패했다"고 반성했다.
집단적 상상력의 실패?
...(중략) 그것이 집단적이 되었든 다른 종류가 되었든 상상력 같은 개념이 경제학의 주류를 이루는 합리주의적 담론에 낄 자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영국 경제학계에서 가장 위대하신 학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댄 끝에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고 인정한 셈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사태의 심각성을 호도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의 전문 분야에 한정된 일만 열심히 하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재난에 희생된 무고한 기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개의 금융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불안과 불평등 악화ㅡ 그리고 지난 30년간 세계를 괴롭혀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장기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만한 경제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