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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3.23 2013.03.22_어느 미술 교사의 교육철학

학부형들은 차례를 기다려 각 과목 담당교사와 마주 앉아 자기 아이의 성적과 학습태도 등에 관하여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미술 교사와 마주 앉아서는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젊은 여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미술시간에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키지 않느냐구요? 그건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 유치원생에게,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아동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과 미적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렇습니다. 석고 데생은 나중에 미술학교에 가서 하면 되고, 실제로 미술학교에선 많이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동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켜선 안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모델을 주입시켜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석고상은 하나의 모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지리가 아닙니다. 석고상을 보고 데생을 하라고 하면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 위험이 있고 따라서 창조적 개성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을 놓고 그리게 하면 아동들끼리 그린 것을 서로 비교합니다. 아동들끼리 우열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특히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녀의 미소지은 모습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녀는 교육학자도 아니었고 교육부장관도 아니었고 일개 중학교의 미술교사였지만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두 아이는 데생 시간이 있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석고 데생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사생대회 같은 것도 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그린 그림 중에는 '나의 집', '나의 식구', '나의 꿈' 등이 있었다. '나'가 앞서 있었다. 따라서 아동마다 서로 다른 그림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린 것을 아이들끼리 비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미술공책의 왼쪽 면에 시를 받아쓰게 했고 오른쪽 면에 그 시에 대한 느낌을 그리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바다는 너의 거울...'로 시작되는 보들레르의 '바다'라는 시를 읽혔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미술교육은 '똑같이 그리기'도 아니고 '잘 그리기'도 아니었다. '창조적 개성'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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