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로부터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란 단어는 접두사 com-과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passio로 구성된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 sentiment'이란 단어로 구성된 명사로 번역된다. (체코어로는 sou-cit, 폴란드어로는 wspol-uczucie, 독일어로는 Mit-gefühl, 스웨덴어로는 med-känsla이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란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영어로는 pity, 이탈리아어로 pietà)은 고통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심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서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동정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의심쩍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는 별로 관계없는 저급한 감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정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간이 '고통 passio'가 아니라 '감정 sentiment'으로 동정이란 단어가 형성된 언어에서 이 단어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나쁜 감정, 혹은 저급 감정을 지칭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어원이 발휘하는 비밀스런 힘에 의해 이 단어는 또 다른 후광을 받아 보다 넓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 (don-sentiment)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sou-cit, wspol-uczucie, 독일어로는 Mit-gefühl, med-känsla의 의미로는)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의 기술을 지칭한다. 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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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_Berlin Philharmonie_Furtwaengler_1937

 

원장은 정말 화를 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그것은 하나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은 이 같은 두 동기로 작곡 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 첫부분에 이렇게 써넣었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
베토벤에 대한 암시를 통해 토마스는 벌써 테레사 곁에 가 있었다.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의 레코드를 사라고 그를 억지로 몰아붙인 사람은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암시는 원장이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찔렀다. 원장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베토벤의 멜로디를 목소리로 흉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야만 합니다'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은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깨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이다.


토마스는 스위스의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고, 나는 헝클어진 머리, 침울한 표정의 베토벤이 몸소 시골 마을 악단을 지휘하여 이민 생활에 작별을 고하는 그를 위해  '그래야만 한다!'라는 제목의 행진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체코 국경을 넘자 그는 소련 탱크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탱크가 지나갈 때까지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검은 군복을 입은 흉측한 전차병이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보헤미아의 모든 도로가 자기 것이라는 듯 교통을 정리했다.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를 되뇌였지만 금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렇다. 쮜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사를 상상하느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에 의해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아파트 문을 연 것은 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카레닌이 반갑다고 얼굴까지 뛰어올라 만남의 순간이 보다 용이하게 되었다. 테레사의 품안에 뛰어들고 싶은 욕망 (쮜리히에서 자동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느꼈던 이 욕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눈덮인 들판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서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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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igent: John Fiore

Chor: Gerhard Michalski

Chor: Christoph Kurig

Inspizient: Monika Müller

Souffleuse: Elke Pop

Spielleitung: Maria Paola Viano


 

+0.  숨겨진 보물을 찾아낸 기분.

불과 이틀전 목요일에 드뷔시의 '펠리아스와 멜리쟝드'를 나름 재미있게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음악은 내 취향이 아니구나... 난해하구나...또 너무 어둡구나...

역시나 대중적인 오페라가 사랑받는 데 다 이유가 있구나... 했던 이유로...

큰 기대없이 표를 샀다.

순전히 오늘 한번 보지 않으면...영영 다시 볼일이 없을 것이다라는...막연한 예감에

볼 수 있을 때 한번은 봐두는 게 남는 것이다라는... 욕심에...

늘 부지런하지 못하면서 많기만한 나의 욕심을,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는 것에까지도 일단은 앞세워버리고 마는 나의 욕심을, 

그래서 너무나도 자주 결국 나를 짖누르기만 하는 그 욕심을... 비우지 못해

나는 안타까움에 두손 주먹 꼭 쥐고는 잡히지 않는 그것을 향해 어떻게든 아둥바둥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게으름이 욕심을 이겼고... 그 수고가 제대로 빛을 발했다...

 

+1.  휴식없이 2시간 진행할 수 있을만큼 콤팩트하게 짜여진, 지루할 틈 없이 전개가 빠른 극도 좋았고...

초반의 인물들의 작은 갈등부터 클라이막스까지 일단 오페라로서 극이 너무 탄탄했다... 

거의 여성극이다 싶을 정도로...그 시대 그곳의 여성입장으로 섬세히 그려진 탁월한 심리묘사도 좋았고...

배우들의 대화들이 대부분 아리아를 연상시킬만큼...어렵지 않은 멜로디도 좋았고...

극 중간에 두번 등장했던 보헤미안 민요를 연상시키는 합창도 좋았지만...

극 전체 곡의 거의 80퍼센트를 노래했을 예누파와 코스텔니카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극이 콤팩트 한 건 좋았지만...

사실 1시간 반 정도가 지나면 으레히 있는 휴식시간이 없으니... 후반부에는 관객 입장인 나도 살짝 피로를 느꼈는데...

오히려 거의 2시간 내내 예누파로 노래했으니 그 피로가 오죽할까 싶을 그 소프라노의 목소리는 정말 마지막까지 흔들림없이...

나를 비롯 관객들을 무대 중앙으로 힘있게 빨아들였다... 

공연 스케쥴을 알아보느라 들어갔던 라인 오페라 홈페이지에서

공연 사진속 주인공들을 보고 실망해서...

역시나 오페라는 몰입이 안된다더라면서 보기를 망설이기도 했었는데...

(전에 DVD로 "아이다"를 보면서...같이 보던 그녀와... 극속 청초한, 실제 아주아주 풍만한 아이다에...

"이거는 아이다~~" 를 연발하기도 했었기에... :-)

그런데... 지금 다시 저 사진을 봐도 신기할 따름인 것이...

저 아줌마가 공연 두시간 내내는 그렇게 어여쁜 예누파로 보이더란 거다...

 

+2.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씨즌 마지막 공연날... 오늘 원래 보려던 투란도트가 매진인 바람에...꿩대신 닭으로 봤던 오페라...

혹시 누군가가 볼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보라고 추천하는 오페라가 되었다...

투란도트의 매진에도 너무 감사하고...

 

+3.  내게 그렇게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공연장이 거의 반만 찼을 정도로...독일에서도 인기있는 오페라는 아니라... 

이렇게 괜찮은 오페라가 어떻게 그렇게 알려지지 않을 수가 있나 싶어 집에 와서 찾아보니...

야나첵의 세번째 오페라 <예누파>는 그의 모든 오페라 가운데 가장 널리 공연될 뿐만 아니라 야나첵의 대표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꼽는 작품이란다.


<예누파>는 그가 좋아했던 베리즈모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영향을 받아 

당대에 유행했던 사실주의 소설을 바탕으로 작곡가 스스로 대본을 쓰고, 

1908년 초연을 한 이후에도 큰 애착을 가지고 수 없이 많이 개작을 거듭했다고 하는데, 

(오페라가 고향인 모라비아에서의 호평에 비해 프라하에서는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한데에 기인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서 지금 현존하는 전곡 음반들도 여러가지이나 대표적으로는 두 가지 버전을 친단다.

 

+4.  작곡가의 고향이 모라비아란다...

`농담`  루드빅의 고향...

지명만으로도 향수를 느끼게 하는 그곳 ...

내 고향도 아니면서 :) 



+5.  간결하게 꾸며진 무대 구성도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극 초반에는 비스듬하게 퍼스펙티브하게 열려있는 저 두 벽이 맞닿아서...

한 벽인 상태로 무대 중앙을 가르고 회전하며...

등장인물들의 물리적 심리적 위치와 상황을 나타냈고...

2막 예누파의 출산 이후 공간이 코스텔니카의 집으로 옮겨온 이후로는

사진처럼 벽을 둘로 나누어 비스듬히 놓고 조명을 더하는 것만으로...

등장인물들의 불안정한 상태와 맞물린 불안정한 공간을 그려냈다... 

 

무대 디자인에도 흥미가 생겼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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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1_농담

2005. 12. 1. 15:27 from was ich (le)se(h)

어떤 사람들은 인류 전체에 대하여 사랑을 외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 반대하여 우리는 개별자로서만 개개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타당한 주장을 한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하며, 사랑에 대한 그 말이 증오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덧붙이고 싶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그러나 이 증오를 순수히 추상적인 원리들, 불의, 광신, 야만성에 집중시켜 보라! 아니면 당신이 인간의 원리 자체마저 혐오스럽게 생각하는데까지 이르렀다면, 인류 전체를 한번 증오해보라! 이런 증오는 너무 초인간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분노를(인간은 이 분노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가라앉히고자 할 때 결국 분노를 한 개인에게만 집중시킬 수 밖에 없는 법이다.

나의 공포는 거기에서 온다. 이제 제마넥은 언제든 자신이 변했음을 (게다가 그는 방금 의심스러우리만치 기민하게 이 점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선언할 수 있고, 내게 용서를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 끔찍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무어라 말 할 것인가?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그와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화해한다면 나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깨져버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면 내 내면의 저울의 한 쪽이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밀란 쿤데라 '농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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