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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3 2009.01.02_촘스키, 끝없는 도전_Noam Chomsky, A Life of Dissent


우리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는 패배감이 스며들었지만, 촘스키는 이에 물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후회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의 저서에는 가장 정확한 20세기 분석이 담겨 있다. 그러나 미국 정책에 관한 그의 비판은 과거나 현재나 주류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역사나 정치를 가르치는 교사와 교수들에 의해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 정치학과에서는 베트남-냉전-중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그의 자료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서, 특히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서 촘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주류 언론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베트남전에 관한 나의 비판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인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은 좌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좌파에서 누가, 베트남 전쟁을 미국과 남베트남의 전쟁이라고,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이 거의 승리했던 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거나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까?(1995.03.31.편지)" 베트남 폭격과 파괴에 관해 당시에 만연했던 비판적 시간을 촘스키는 이렇게 요약한다. "주류 언론의 스펙트럼 내에서 가장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때, '베트남전은 선행을 베풀기 위한 어설픈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재난'으로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의 1964년 공격을 '방어행위'라고 지칭하며 지지했던 이단자는, 전쟁 후에도 자신의 입장이 끝내 옳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좌파 내에서의 일반적인 견해는, 베트남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미국이 패했다는 것입니다." 촘스키는 다시 한번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강조한다. "나의 견해는 에드워드 허먼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전쟁 발발로부터 1973년 평화조약에 이르는 그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공동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발표한 자세한 자료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1995.03.31.편지)."


물론 촘스키와 그의 견해에 공감하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반대하던 초기에 훨씬 더 심하게 소외되었다.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추진한 인도차이나식 침략방식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예견했다. 엘 살바도르, 니카라구아, 트리폴리, 이라크 등을 생각해 보면 이 예견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관한 대부분의 재평가는 미국 정부가 저지른 실책, 대개는 전술적 실책들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평가들은 종종 철저한 평가로 간주될 뿐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이 평가가 수용되는 것 자체가 미국 정치체제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치체제가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촘스키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베트남에서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 비판의 화살은 언제나 그들이 의도했던 것, 그리고 대개 성취했던 것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도 분명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수를 범했지만, 나의 비난은 그들의 침략과 만행에 대한 것이었지 그들의 실수에 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본질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러시아 공산당의 인민위원에게는 중요했겠지요. 우리의 이데올로기 체제 안에서 누군가가 '실수' 이상의 어떤 것을 비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독재국가인 러시아가 좀 더 개방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1995.03.31.편지)

촘스키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문제삼고 나왔을 때에도, 그들은 촘스키의 글에 깔려 있는 핵심을 간과하고 지엽적인 문제만을 취하곤 했다. 그나마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미국이 품고 있던 근본적으로 반도덕적인 목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1973년 12월 21일자 '타임즈 문학판'에서 '국가의 이유'와 '밀실의 남자들'의 서평을 발표한 저자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수한 문제를 거론했다. 즉 이 책은 출판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공개된 자료들, 특히 펜타곤 서류 사건의 관련 자료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이 출간되기 오래 전에 쓰여졌으며, 출판사의 결정에 의한 것임에도 다른 제목의 두 권으로 발행되었다고 비난했을 뿐 아니라 촘스키가 원고를 완벽하게 수정하지도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폈다. '밀실의 남자들'에 대한 나이젤 영의 서평은 1974년 '타임즈 고등교육 부록'에 실렸다. 나이젤 영도 촘스키의 문체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촘스키의 책이 학문적 모습을 취하고는 있지만, 논쟁적이라고 폄하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촘스키 읽기'에 대한 서평이 '타임즈 문학판'에 게재되었다. 서평의 저자인 찰스 타운젠드는 촘스키의 스타일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이 책의 열정적인 전개 속도, 참고 문헌과 세부적 설명들의 과도함을 비판했고, 그 방식은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첫머리에서 독자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문체나 장르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촘스키 글의 핵심적 주장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인텔리겐차는 공식적인 학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는 촘스키의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다. 1973년 12월 21일자 '타임즈 문학판'에 실린 서평의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촘스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들춰냈고 미국의 행정부가 아시아에서 신과 같은 역할을 행하게 된 경위를 폭로하고 있다고 회고한다. 이 평론가는 아시아의 농촌 지역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공격이 의도적이고 잔악하다는 사실을 파헤친 촘스키의 용기를 너그럽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평은 글의 주제를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서평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덜 오만하고 보다 자비로운 방법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치른 대가는 성취한 목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촘스키와 허먼의 견해를 무시하고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냉전에서도 그랬다. 비록 냉전의 유지는 무의미해 보였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를 분할했고 자국의 군수공장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촘스키의 저서가 비슷한 내용을 머크레이커들의 글과 구분되는 점은 베트남전을 몰고 온 사고방식이 이미 제도적으로 깊이 뿌리내린 상태임을 매우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정부관리도 미래의 정권이 저지를 잔혹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제국주의간 권력투쟁에서 인간적인 해결방법과 교훈은 대부분 차단되어 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관리들이 배울 수 있다고 입증된 것은 고작해야 어떻게 하면 전술적 실수를 줄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하면 전술적 실수를 줄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하면 좀 더 살인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뿐이다. 촘스키를 논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거의 일률적으로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1973년 '타임즈 문학판'의 논평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역시 제국주의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상투적인 암시로 글을 끝맺었다.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Noam Chomsky, A life of dissent)' 중에서...

Posted by 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