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가던 사람이 도중에 큰 강물을 만났다.
이쪽 기슭은 위험하고 무서운데, 강 건너 저쪽은 평화로워 두려움이 없다.
강을 건널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이 때 길을 가던 사람은 나무와 가지, 풀과 넝쿨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무사히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뗏목은 길을 가던 나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 뗏목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강을 건널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는 이 뗏목을 머리에 이든지 어깨에 메든지 하고 가야겠다.'
그가 이와 같이 한다면 과연 그 뗏목에 대한 도리를 다한 것이겠는가?
종교의 가르침은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고뇌하는 사람들에게 그 고뇌의 강을 건너게 하는 방편이요, 수단이다.
강을 건너 걱정과 근심이 사라졌다면, 그 '뗏목'은 버려야 한다.
종교적인 가르침이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에게 말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황이나 사정이 바뀌면 그 가르침은 쓸모가 없다.
법도 버려야 할 터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법정 스님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중에서...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대청소를 해야할 때인가? 방도, 몸도, 마음도...
무상(無償)하다는 말은 허망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한다는 뜻이다. 이게 우주의 실상이다. 이 변화의 과정 속에 생명이 깃들이고, 이런 변화의 흐름을 통해서 우주의 신비와 삶의 묘미가 전개된다. 만약 변함이 없이 한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숨이 멎은 죽음이다. 살아 있는 것은 끝없이 변하면서 거듭거듭 형성되어 간다. 봄이 가고 또 오고,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그와 같이 순환한다. 그것은 살아 있는 우주의 호흡이며 율동이다. 그러니 지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할 게 아니라, 오는 세월을 유용하게 쓸 줄 아는 삶의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 법정 스님 '새벽 달빛 아래서' 중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녹슬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다.
녹은 어디서 생기는 가.
물론 쇠에서 생긴다.
쇠에서 생긴 녹이 쇠 자체를 못쓰게 만든다.
일상적인 타성과 게으름을 녹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투철한 각성과 분발을 통해 녹은 제거된다.
계절의 변화는 우리 삶에도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 고맙다.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리고 있다.
이 가을에 당신은 어떤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가.
*법정 스님 '산천초목에 가을이 내린다' 중에서...
과거를 따르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한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
다만 오늘 해야 할 일에 부지러히 힘쓰라.
그 누가 내일 죽음이 닥칠지 알 것인가.
*법정 스님 '인간의 가슴을 잃지 않는다면' 중에서...
우리는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가. 아직도 몇 분이 남았다고 하면서, 또는 시간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일 없이 아까운 시간을 쏟아 버린다. ...중략...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에 팔리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순간순간을 알차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시간 밖에서 살 수 있다. *법정 스님 '시간 밖에서 살다' 모니터 아래 시계를 자주 힐끔거리며...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는... 일상과 맞물려...아주 푸욱 찔리다... 억...
내 팔과 다리가 수고해 준 덕에 말끔히 일을 마쳤다.
초겨울까지는 땔만한 분량이다.
땀에 전 옷을 개울가에 나가 빨아서 널고, 물 데워서 목욕도 했다.
내친 김에 얼기 설기 대를 엮어 만든 침상을 방안에 들여 놓았다.
여름철에는 방바닥보다는 침상에서 자는 잠이 쾌적하다.
침상은 폭 70센티미터, 길이 180센티미터, 높이 30센티미터로 내 한 몸을 겨우 받아들일 만한 크기다.
뒤척일 때마다 침상 다리가 흔들거리는 것이 마치 요람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다.
일을 마쳤으니 한숨 쉬기로 했다.
내가 살 만큼 살다가 숨이 멎어 굳어지면 이 침삼째로 옮겨다가 화장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아무도 없는 데서, 제발 조용히, 벗어버린 껍데기를 지체없이 없애주었으면 좋겠다.
잠결에 쏴 하고 앞산에 비 몰아오는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이제는 나무간에다 땔나무도 들이고 빨래줄에 옷도 거두어들였으니,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 소서.'
한동안 가물어 채소밭에다 물을 길어다 뿌려주곤 했는데, 비가 내리니 채소들이 좋아하며 생기를 되찾겠다.
자연은 순리대로 움직인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는 짓만 하지 않으면, 그 순리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모든 것을 대준다.
이런 자연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웬걸...아침에 눈 뜨며 물 한잔 마시며, 이 녀석들 한테도 물 한모금 나눠주는 재미, 이래적으로 눈부시게 파랬던 가을 하늘아래 푸르른 잎사귀들이 안기는 즐거움과 흐뭇함이 그래도 꽤 쏠쏠한 것이었다.
얼떨결에 화분 잘 키운다고 1달간 같이 지냈던 그녀 M한테 칭찬도 듣고...
그녀 왈...이렇게 바실리쿰을 잘 키우는 건 처음 봤단다...
그런데... 요즘 이 녀석, 바실리쿰 이라는 놈이 좀 문제다...
애시당초 이 놈을 들일 때 부터의 주 목적이 스파게티에 더 신선한 향을 공급하겠다는 것이기는 했었지만....
한국 다녀오고서 한참 동안은 갑자기 스파게티에 대한 열의가 꺽여서...
또 한달 동안은 같이 지내던그녀가 스파게티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서...
등등의 이유로 한동안 스파게티를 멀리하면서...
애초의 목적과 달리 바실리쿰은 관상용으로 방 창틀에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나의 스파게티 사랑이 결국에 어디가겠는가???
11월 중순을 넘기며...스파게티 요리가 재개되었다...특히나 스스로의 해물 스파게티 요리 실력에 감동하면서...
그런데 그 무성한 잎들 사이에서 몇개 떼어 낸다고...큰 타격이 절대 아닐 터인데...
갑자기 이 놈들이 식용으로 용도 변경 되면서부터 갑자기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실수로 하루 창일 열어두고 외출을 해서, 종일 찬바람 쏘이게 한 적이 있긴 하지만은...
그래도 따악 시기 적절하게 내가 먹자고 팔 걷어 붙이고 나서면서부터...
이 녀석들이 시들시들 마르기 시작하는 걸 보니...
꼭 내가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이놈들 한번 잡아 먹어보겠다고 꾸역꾸역 먹이고 언제나 살이 좀 붙나 기다리는 마녀에게...
헨젤이 통통한 자기 팔 대신에 먹고 남은 뼈다귀를 내 밀었듯이...
이 녀석들도 내 눈앞에서만 시들시들하고, 내가 자리 비운 사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쌩쌩해지는 것은 아닌가...
모 이런 말도 안되는 상상을 잠시 해보는 거다...
그림형제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가?
이 영화 지독하게 재미없었는데...참...
사람의 눈길과 따뜻한 관심이 식물의 세계와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식물학자 루터 버뱅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식물을 독특하게 길러내고자 할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그 식물에게 말을 건넨다.
식물에게는 20가지도 넘는 지각 능력이 있는데, 인간의 그것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그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난 여름 절 마당 한쪽에 버려진 덩굴식물이 눈에 띄어 그걸 주워다 화분에 심어 두었다.
최근에야 그 이름이 '싱고니움'이란 걸 알았다. 그때는 이파리가 두 잎뿐이었는데 한 잎은 이내 시들고 말았다.
날마다 눈길을 주면서 목이 마를까봐 물을 자주 주었다. 덩굴은 한참 만에 기운을 차리고 새 줄기와 잎을 내보였다.
받침대를 세워주고 차찌꺼기 삭힌 물을 거름삼아 주었다.
겨우 한 잎뿐이었던 것이 지금은 30여개나 되는 이파리와 두 자반이 넘는 줄기로 무성하게 자라났다.
보살핌에 대한 그 보답을 지켜보면서, 식물은 우주에 뿌리를 내린 감정이 있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음....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