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의 자유 사회 내지 국민적 합의가 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9년에 대공황이 일어나면서부터다. 1933년에 들어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민주당 정권은 대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시행했는데, 정북 개입 또는 국가 통제에 의한 복지정책과 공공사업은 개인적 자립과 자유방임을 강조해 온 미국의 전통에 어긋났다. 대중의 지지에 의해 미국 대통령 사상 네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루즈벨트 정권은 종전의 개인주의적, 자유방임주의적인 가치를 대신하여 공동체주의적, 사회주의적, 정부간섭주의적인 가치를 강조했을 뿐더러, 1933년에는 공산국가인 소련을 승인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당은 지속적인 대 공산주의 유화정책을 했는데,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뉴딜 진보주의자들은 보수 세력에 의해 공산주의자와 동일시되었고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민주당 정부는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돌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파들은 루즈벨트를 공공연히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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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진보주의 권력층과 1960년대 문화적 좌파는 서로 다른 사회 환경 속에서 태어난 별개의 세력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은 수십 년 동안 서로 엉켜 하나의 세력처럼 행동했다. 진보 좌파에 대한 집단적이고 의식적인 최초의 보수 우파 출현은 1974년 생겨났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공화당의 닉슨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백악관을 물려받은 제럴드 포드가 민주당과 진보주의 언론을 달래기 위해 부통려에 공화당 내의 진보적 인사였던 넬슨 록펠러를 지정하자, 공화당의 젊은 보수즈의자들은 크게 우려했다. 포드의 이런 선택은 중산계급 정당인 공화당을 민주당과 같은 빈민의 당으로 만드는 것과 함께 근면, 지조, 자유방임의 미국적 생활 방식을 훼손하여 국가의 성격과 진로마저 바꿀 수 있는 위기로 받아들인 것이다. 진보 좌파 세력에 대항할 보수 우파 세력을 조직해야할 필요성을 느낀 기업가와 정치가들이 신우파(the new right)라는 기치 아래 모이기 시작했고, 해리티지 재단과 같은 두뇌 집단의 가동과 보수주의 잡지 발간, 진보주의 정치가들에 대한 낙선 운동, 진보 입법 반대 운동이 이때부터 활동한다. 진보주의 권력층이 훗날 문화적 좌파와 연대했듯이, 미국 사회의 상층부에서 시작된 보수주의 인사들의 반격은 시간이 지나면서 중하층 대중의 민중주의(Populism) 운동으로 변이, 착종됐다.


미국 중하층 대중들이 자진해서 보수 우파에 가담하게 된 까닭은 상류층과 하류층의 중간에 끼어 정부와 사회로부터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특권을 누리고 있는 상류층이나 정부로부터 복지혜택을 받고 있는 하류층과 달리, 각종 세금 납부에 시달리면서 희생당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진보 좌파가 이루어 놓은 흑인 민권 확장에도 분개했다. 부자들은 자녀를 흑인이 없는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지만 중하층 구성원들은 삶의 현장에서 매일 흑인과 부딪쳐야 하므로 민중들에게 사회적, 인종적 평등 실험을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여성 권익의 신장과 소수 인종에 대한 우대 조치는 물론 개인의 범죄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진보 좌파에 대해서도 분노했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싸울 때 (양심적) 병역 회피를 했을 뿐 아니라 귀환 장병을 조롱하고 모욕한 진보 좌파에 대해서도 원한을 품었다.

보수주의 정객들을 기꺼이 따르고자 원하는 미국의 우파 민중주의는 제3세계의 좌파 민중주의와 전혀 다르다. 제3세계의 민중주의자에게는 자본가와 지주가 타오해야 할 적이지만, 미국의 우파 민중주의자들에게는 진보 좌파 지식인, 관료, 언론인, 성공한 여성과 흑인(또는 소수 인종)이 그 적이다. 미국에 좌파 민중주의는 없다는 전제하에서, 현대 미국 민중주의는 중서부와 남부 농업 지대에서 일어난 19세기 말의 민중주의 세력과도 전혀 비슷한 점이 없다. 19세기 말의 미국 민중주의자들의 적은 동부의 금융가 엘리트와 산업가 엘리트였으나 위에서 본 것처럼, 현대 민중주의자들의 적은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나 자본가를 피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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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은 민주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파란색, 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붉은색으로 표시한다. 2004년 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면, 못사는 농촌과 쇠락한 공장 지대에서 부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화당에 표를 던진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실제로 '블루 아메리카' 여야 하는 곳이 왜 선거만 하면 '레드 아메리카'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창궐하는 '뉴 라이트'와 서민층의 보수화, 한국은 미국을 따라가나?

장정일의 공부...'미국의 극우파에 대한 명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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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에 대한 비유일 것이다.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어떤 사람이 막 우물로 들어가려는 어린아이를 문득 발견한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두렵고도 측은한 마음이 일 것이다." 즉 우물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본 낯선 사람의 마음에 '측은한 마음'이 드는 까닭은 사람의 마음마다 아이를 걱정하는 '착한 마음'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종오는 이 주장을 반박한다. 그 문장은 분명히 "출척측은(怵惕惻隱)이라는 네 글자를 사용했다"면서, 왜 측은말을 말하고 출척은 말하지 않을까라고 묻는다. 거기에 논리상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종오의 논박에 의하면 '측은'한 마음이 있기전에 먼저 '출척'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어린아이'가 있기전에 내가 먼저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고 한다. "우선 내가 있고서야 비로소 아이가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우물에 빠질 수도 있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터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길 리가 없다.내가 없으면 곧 어린 아이도 없고, '출척'의 마음이 없으면 '측은'의 마음도 없다."

계속되는 설명에 따르면 어린아이는 '나'의 확대형이고 측은은 출척의 확대형으로 맹자가 사람들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을 확대하라고 가르친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측은지심은 출척지심을 확대한 것이라는 말을 삼갔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오해를 했다"고 한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점을 살펴보지 못한 채 측은지심을 인성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주자학은 봉건적 윤리만 남기고 인간의 욕망을 버리는데 중점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맹자는 "어린 아이 가운데 자신의 부모를 사랑할 줄 모르는 애가 없고, 자라서는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애가 없다"고 말하지만 이종오는 그 말에서도 적잖은 모순을 발견하다. "만일 엄마 손에 떡이 있는 것을 보면 아이는 손을 뻗어 떡을 먹으려고 덤빌 것이다. 엄마가 떡을 아이에게 주지 않고 자기 잆속에 넣는다면 아이는 손을 뻗어 엄마 잆고에 있는 떡을 꺼내 냉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갈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현상을 아이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린 아이가 엄마 품속에서 무언가를 먹고 있을 때 형이 다가오면 그 아이는 형을 밀어내거나 때리려고 할 것이다. 이런 행동이 과연 형을 공경하는 모습일까. 전 세계 어린 아이 중 이와 같지 않은 아이는 한명도 없을 것이다."

어린 아이였을 때 "공자도 어미 입속에 있는 떡을 뺏어 먹었을 것이고, 나(이종오)와 어린 아이가 동시에 우물에 들어가려고 할 경우 공자도 오직 두려움만이 있을 뿐 측은지심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종오의 무선무악설이 귀착하는 곳은 여러번 강조됐던 '나()'이다.

"엄마와 형을 비교하면 엄마가 나에게 더 가깝고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린아이는 엄마를 더 사랑한다. 조금 더 커서 이웃 사람과 만날 때 곧 그들과 형을비교해 형이 자신과 더 가깝다고 느끼기 때문에 당연히 형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여기서 좀 더 범위를 확장해 다른 지역으로 갔을 때를 상정해 보자. 타향에 가면 이웃 사람을 더 사랑하고, 외국에 가면 자기 나라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그 법칙은 대상이 나와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애정이 더 돈독해진다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애정의 농도는 자신으로부터의 원근에 반비례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부모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한다는 맹자의 말은 사실 이면에 '나'를 숨기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인(爲人: 사람의 됨됨이)의 논리인 측은(惻隱)보다 위아(爲我: 스스로의 이익을 쫓아 행동함)의 논리인 출척(怵惕: 두려워 조심함)을 중시하라고 그는 말한다. 

*장정일의 공부...'전복과 역설의 뻔뻔함과 음융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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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부활 프로젝트'라는 거창한 부제가 달린 '장정일의 공부'...
처음 읽은 장정일의 글이다...

그의 화제작들 대부분이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에 쓰여졌었고...
(당시에는 장정일을 읽기에 좀 순진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 이후에는 문단 활동이 좀 뜸해지고 잊혀지면서...
그의 소설을 읽을 기회가 없었다...
작년 봄즈음이었나? 블로그 써핑을 하다가 우연히 서평을 읽고 호기심이 일어
굳이 동생에게 부탁해서 비행기타고 날아온 소포로 전해 받은 책이었는데...
첫장을 읽고 실망을 해서 덮어두고...다시 펼쳐 읽는데까지...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그래도 근 1년 반을 꿎꿎히 침대 머리맡을 지킨 덕에...이번에 침대에 오래 머물면서...마침내 다 읽혔다...
이번에 침대 머리맡의 책 두권을 간신히 정리했다...

부제가 저리 거창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실망하지 않았을까?
독후감이니만큼...읽은 글에 따라 쓴 글의 수준 편차가 심하긴 하지만...전반적으로 얕다...
하긴...인문학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씌웠지만...
결국 글을 읽고 난후의 짧은 감상에 불과한 글들의 깊이가 깊어봤자일 게다...
기나긴 공부와 고민을 통해 나온 제대로 된 한 권의 인문서를 기대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지도...

+0. '다르다'와 '틀리다'를 틀리게 쓰는 것에 좀 예민한 편인데...
      세상에 그의 글에서 띄엄띄엄 발견했다...
      세상에 대한민국 최고의 글쟁이 중 하나라는 이의 글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1.  다음에 한국에 들어가면 그의 옛 소설들을 좀 찾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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