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12.23 2008.12.23_Mitleid vs. Mitgefühl 그리고 동정
  2. 2008.12.21 2008.12.21_muss es sein? es muss sein! es muss sein!_'신중하게 내린 결정' 2

라틴어로부터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란 단어는 접두사 com-과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passio로 구성된다. 다른 언어, 예컨대 체코어, 폴란드어, 독일어, 스웨덴어에서 이 단어는 똑같은 뜻의 접두사와 '감정 sentiment'이란 단어로 구성된 명사로 번역된다. (체코어로는 sou-cit, 폴란드어로는 wspol-uczucie, 독일어로는 Mit-gefühl, 스웨덴어로는 med-känsla이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언어에서 동정이란 단어는 타인의 고통을 차마 차가운 심장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 고통스러워하는 이에게 공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거의 같은 뜻을 지닌 연민(영어로는 pity, 이탈리아어로 pietà)은 고통받는 존재에 대한 일종의 관용심을 암시한다. 한 여인에게서 연민을 느낀다는 것은 그녀보다 넉넉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몸을 낮춰 그녀의 높이까지 내려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동정이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의심쩍은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사랑과는 별로 관계없는 저급한 감정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동정삼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어간이 '고통 passio'가 아니라 '감정 sentiment'으로 동정이란 단어가 형성된 언어에서 이 단어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나쁜 감정, 혹은 저급 감정을 지칭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어원이 발휘하는 비밀스런 힘에 의해 이 단어는 또 다른 후광을 받아 보다 넓은 뜻을 지니게 되었다: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 (don-sentiment)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동정(sou-cit, wspol-uczucie, 독일어로는 Mit-gefühl, med-känsla의 의미로는)은 고도의 감정적 상상력, 감정적 텔레파시의 기술을 지칭한다. 감정의 여러 단계 중에서 이것이 가장 최상의 감정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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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_Berlin Philharmonie_Furtwaengler_1937

 

원장은 정말 화를 냈다. 토마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어'
그것은 하나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의 마지막 악장은 이 같은 두 동기로 작곡 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 첫부분에 이렇게 써넣었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
베토벤에 대한 암시를 통해 토마스는 벌써 테레사 곁에 가 있었다. 베토벤의 4중주와 소나타의 레코드를 사라고 그를 억지로 몰아붙인 사람은 그녀였기 때문이다. 이 암시는 원장이 음악 애호가였기 때문에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찔렀다. 원장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베토벤의 멜로디를 목소리로 흉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래야만 하는가?'
토마스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야만 합니다'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베토벤은 음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작곡가 자신보다는 베토벤의 해설가에게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니면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겠지만), 우리는 오늘날 이런 신념에 어느 정도 동조한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깨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올리는 역도 선수이다.


토마스는 스위스의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고, 나는 헝클어진 머리, 침울한 표정의 베토벤이 몸소 시골 마을 악단을 지휘하여 이민 생활에 작별을 고하는 그를 위해  '그래야만 한다!'라는 제목의 행진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체코 국경을 넘자 그는 소련 탱크 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는 사거리에 차를 세우고 탱크가 지나갈 때까지 30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검은 군복을 입은 흉측한 전차병이 사거리에 자리를 잡고 보헤미아의 모든 도로가 자기 것이라는 듯 교통을 정리했다. 토마스는 '그래야만 한다!'를 되뇌였지만 금새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렇다. 쮜리히에 남아 프라하에 혼자 있는 테레사를 상상하느 것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오랫동안 동정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아야 했을까? 일생 동안? 한 달 동안? 딱 일주일만?
어찌 알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을까?
물리 실험 시간에 중학생은 과학적 과정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실험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므로 체험에 의해 가정을 확인해 볼 길이 없고, 따라서 그의 감정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가 아파트 문을 연 것은 그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카레닌이 반갑다고 얼굴까지 뛰어올라 만남의 순간이 보다 용이하게 되었다. 테레사의 품안에 뛰어들고 싶은 욕망 (쮜리히에서 자동차에 올라타는 순간까지도 느꼈던 이 욕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들은 눈덮인 들판 한가운데서 마주 보고 서 있었고, 두 사람 모두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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