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볼 기운이 없어 빨래를 하며 집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는 가벼운 하소연,
그러나 너의 낭랑한 전화 목소리는 아빠의 가슴에 단비를 퍼부었다. 전번에 네 편지에 외로움을 이겨 나가는 버릇이 생겼고 무엇이나 혼자서 해결하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여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고적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이기에 일상생활의 가지가지의 환락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현대에 있어 연구생활은 싸움이다. 너는 벌써 많은 싸움을 하여왔다. 그리고 이겨왔다.
이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리 탐구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특히 과학은 연구 도중 너에게 차고 맑은 기쁨을 주는 순간이 많으리라.
허위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 이 직업에는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영예가 있으리라 믿는다.
네 편지에 너는 네가 아빠가 실망하게 변해 가지는 않나 생각해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빠가 싫어할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도 하였다.
남들이 너를 보고 무척 어려 보인다고들 하고, 대학 몇학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너는 아빠에게는 지금도 어린 소녀다. 네가 남에게 청아한 숙녀로 보이는 때가 오더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어린 딸이다.
네가 대학 다닐 때 어떤 밤 늦도록 하디의 소설을 읽다가 내 방으로 와서 '수(Sue)가 가엾다'고 하였다.
네 눈에는 눈물이 어렸었다.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와 같은 강한 여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는 디킨스의 애그니스같이 온아하고 참을성 있는 푸른 나무와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 순조로운 가정 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아니면 외롭게 살며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 네가 택해야 할 길인지 그것은 너 혼자서 결정할 문제다. 어떤 길이든 네가 가고 싶으면 그것이 옳은 길이 될 것이다.
요즘 틈이 있으면 화이트헤드와 러셀을 읽는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들은 둘다 수학에서 철학으로 올아간 학자들로 다른 철학자들보다 선명하고 모호한 데가 적으리라 믿는다.
과학을 토대로 하지 않는 철학은 기초 작업이 튼튼치 않은 성채와 같다.
한편, 과학자에게는 철학공부가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은 광맥을 파 들어가는 것과 같이 좁고 깊은 통찰은 할 수 있으나 산 전체의 모습을 알기 어렵고 산 아래 멀리 전개되는 평야를 내려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시간을 아껴 철학과 문학을 읽고, 인정이 있는 언제나 젊고 언제나 청신한 과학자가 되기 바란다.
안녕안녕 아빠.
잠 아니 올때는 리부륨 대신 포도주를 먹어라.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글은 읽는 당시 나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서 자주 많이 다르게 기억된다.
도대체 이 쓰레기같은 잡문들을 가지고 왜 노벨상 운운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피천득의 '인연'을 처음 읽을 때의 나는 참으로 팍팍했구나 한다...
얼마전에 법정스님의 글을 다시 읽고 감흥이 좀 달라서, 피천득의 수필집도 내친김에 다시 한번 집어들었다...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글들이 대체로 여전히 와닿지 않고 내 감성의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름마냥 겉돌기만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드문드문 가슴을 두드리는 글들을 발견한다...
피천득씨가 딸에게 이 편지를 읽으며...
오랜만에 독일 온 첫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기억했다...
매번 규격 편지지 두 장을 꽉 채웠던 아빠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아빠의 딸에 대한 안쓰러움과, 염려, 걱정 그리고 자랑스러움과 믿음이...
피천득씨가 딸에게 보낸 편지에 담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 편지를 교환할 만큼의 살뜰함은 없던 우리가족은...
동생과 내가 부모님 품을 한꺼번에 떠나오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아빠의 편지에서 아빠의 여림을 처음 읽고...
엄마의 카드에서 엄마의 유머를 처음 알고...
동생의 편지에서 동생을 믿게 되었다...
독일에 처음 온 몇해간은 간혹 펜을 들어 편지를 써서 부치기도 했었다...
편지가 끊어졌던 게 언제부터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