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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_딸에게

2011. 10. 3. 20:04 from was ich (le)se(h)
'책 볼 기운이 없어 빨래를 하며 집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는 가벼운 하소연,
그러나 너의 낭랑한 전화 목소리는 아빠의 가슴에 단비를 퍼부었다.

전번에 네 편지에 외로움을 이겨 나가는 버릇이 생겼고 무엇이나 혼자서 해결하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여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고적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이기에 일상생활의 가지가지의 환락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현대에 있어 연구생활은 싸움이다. 너는 벌써 많은 싸움을 하여왔다. 그리고 이겨왔다.
이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리 탐구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특히 과학은 연구 도중 너에게 차고 맑은 기쁨을 주는 순간이 많으리라.
허위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 이 직업에는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영예가 있으리라 믿는다.
 

네 편지에 너는 네가 아빠가 실망하게 변해 가지는 않나 생각해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빠가 싫어할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도 하였다.
남들이 너를 보고 무척 어려 보인다고들 하고, 대학 몇학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너는 아빠에게는 지금도 어린 소녀다. 네가 남에게 청아한 숙녀로 보이는 때가 오더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어린 딸이다.


네가 대학 다닐 때 어떤 밤 늦도록 하디의 소설을 읽다가 내 방으로 와서 '수(Sue)가 가엾다'고 하였다.
네 눈에는 눈물이 어렸었다.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와 같은 강한 여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는 디킨스의 애그니스같이 온아하고 참을성 있는 푸른 나무와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 순조로운 가정 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아니면 외롭게 살며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 네가 택해야 할 길인지 그것은 너 혼자서 결정할 문제다. 어떤 길이든 네가 가고 싶으면 그것이 옳은 길이 될 것이다.
 

요즘 틈이 있으면 화이트헤드와 러셀을 읽는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들은 둘다 수학에서 철학으로 올아간 학자들로 다른 철학자들보다 선명하고 모호한 데가 적으리라 믿는다.
과학을 토대로 하지 않는 철학은 기초 작업이 튼튼치 않은 성채와 같다.
 

한편, 과학자에게는 철학공부가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은 광맥을 파 들어가는 것과 같이 좁고 깊은 통찰은 할 수 있으나 산 전체의 모습을 알기 어렵고 산 아래 멀리 전개되는 평야를 내려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시간을 아껴 철학과 문학을 읽고, 인정이 있는 언제나 젊고 언제나 청신한 과학자가 되기 바란다.


안녕안녕 아빠.


잠 아니 올때는 리부륨 대신 포도주를 먹어라.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Posted by GIN :

2011.09.30_전화

2011. 9. 30. 23:51 from was ich (le)se(h)
갖은 괴로움을 견디면서도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의 하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사람 이외에는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살면 언제나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전화를 가짐은 불현듯 통사정을 하고 싶은 때, 목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을 때, 이런 때를 위해서다.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전선이 아니라도 정의 흐름은 언제 어느데서고 닿을 수 있지마는.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Posted by GIN :

2011.09.29_우정

2011. 9. 30. 06:07 from was ich (le)se(h)
어느날 나는 영이 보고 배가 고프면 골치가 아파진다고 그랬다.
'그래 그래'하고 영이는 반가워하였다. 그때 같이 영이가 좋은 때는 없었다.

우정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하품을 하면 따라 하품을 하듯이 우정은 오는 것이다.

오랫동안 못 만나게 되면 우정은 소원해진다.
희미한 추억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나무는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르는 것이 더 어렵고 보람 있다.
친구는 그때그때의 친구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좋은 친구는 일생을 두고 사귀는 친구다.

우정의 비극은 이별이 아니다. 죽음도 아니다.
우정의 비극은 불신이다.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비극은 온다.
'늙은 어머니가 계셔서 그렇겠지.'
포숙이 관중을 이해하였듯이 친구를 믿어야 한다.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보다는 믿다가 속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Posted by 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