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탱은 파리 오페라좌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오페라좌의 지하에 지하수가 흐른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 지하수에서 송어를 기르고 있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그것도 오페라좌 밑에 송어 양식장이 생긴 것이다.

그의 직장 동료인 장 피에르는 마르탱의 기발한 부업(?)에 부러움과 흥미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동업(?)하자고 덤빌 사람이 아니었다. 프랑스인의 개성은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건물의 지하에서 송어를 기른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그것 또한 프랑스인의 개성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송어 양식과 다른 '어떤' 기발한 일을 찾아내야 했다. 드디어 그도 한 가지 착상을 해냈고 두달 동안 혼자 책을 읽으며 연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은 뒤에 벌통 두개를 오페라좌의 지붕 위에 갖다 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만 마리의 벌들이 오페라좌의 지붕에 보금자리를 차렸고 파리 시내 곳곳의 공원과 아파트 발코니에 있는 이꽃 저꽃들에서 꿀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장 피에르는 갑자기 양봉사업을 부업으로 갖게 된 셈이다. 마르탱과 마찬가지로 파리 시내 한복판, 오페라좌에서였는데 다른 점은 사업 현장이 지하가 아니라 지붕이라는 점이었다.

드디어 꿀이 산출되었다. 공기 오염이 심한 도심지에서 좋은 꿀이 나올리가 없으리라는 애초의 예상을 뒤엎고 품질과 맛이 아주 뛰어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 꿀은 '파리의 꿀'이라는 상표로 파리에서 제일 비싼 식품가게인 포숑에 넘겨졌다. 의외의 수확을 얻은 장 피에르는 신이 났고 오페라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지붕 위에도 벌통을 갖다 놓았다.


파리의 오페라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희한한 일들은 서울의 오페라가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도 연출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서울에는 지하수도 없고 송어도 없고 벌떼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마르탱이나 장 피에르 같은 연출자가 없다. 혹 마르탱 같은 사람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장 피에르는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송어 양식으로 재미본다'는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가 송어 양식에 덤벼들 테니까.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글을 읽다가 문득 아직도 양식과 양봉을 하고 있을라나??? 궁금해졌다...

송어 양식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Pariser Honig 라고 검색을 해봤더니...우와...프랑스인들 양봉은 확실히 한발 더 나갔다...

누군가가 '지붕 위 양봉으로 재미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붕 위 양봉도 좀 더 보급된 모양이고...

누군가가 '재미본다' 싶으면 우리나라에서 좀 심하게 붐이 일기는 하지만...꼭...우리나라만의 일이라고...자학할 일도 아니다...


루이비똥에서도 파리 매장 옥상에 (위 사진 속...고작) 3개의 벌통을 설치해놨다가 걷어서 고급꿀로 팔며...

친환경 운운하는 모양이다...

genial 하긴 한데...뒷끝은 좀 찝찝한건...꼭 선입견 탓일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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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하면 아주 좋은 날씨를 가진 복받은 사람들이다. 유럽인들이 "봉쥬르(좋은 날)!", "본 조르노", "구텐 모르겐" 등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유럽의 일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보릿고개와 같은 굶주린 경험을 가진 우리가 때마다 "아침(점심, 저녁) 드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나누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기후가 나쁜 것은 멕시코 난류의 습기를 먹은 편서풍 영향을 받아서 으레 잿빛 하늘을 보아야 한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을 기다리는 것은 부활절 그 자체보다 부활절 때부터 일기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경부터 9월까지 4~5개월만 괜찮고 10월경부터는 잔뜩 찌푸린 날씨가 이듬해 4월까지 연일 계속된다. 

여름엔 기온이 간혹 30도를 넘기도 하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불쾌지수가 높지 않아 흔쾌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영하 5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어도 항상 습하기 때문에 뼈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느끼게 된다. 나같은 사람이 우리 나라 겨울의 양지가 마냥 그리워지는 때가 바로 이런 때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0.  창밖을 보고 아침 댓바람부터 하늘에다 대고...욕을 할뻔 했다...울컥...

미친거야???


+1.  하루 종일 내리는 눈을 한동안 그윽히 바라보던 안야가 말했다...

"아...크리스마스 장이 다 내리고 없는게 너무 안타깝다...나...나가서 글뤼바인 마시고 싶은데..."

"아...오스턴글뤼바인???"


+3.  안야가 물었다..."진...한국 날씨는 요즘 어때???"

"괜찮은 거 같아...지금은...15도 쯤..."

안야가 또 물었다..."나...이거 꼭 물어봐야 할거 같아... +/-???"


+4.  이번 주말이면...벌써 부활절인데...

올해 부활절엔 추워서...토끼는 못나오겠다...쩝...



Scheiß Schnee!!!

Scheiß Schn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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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들은 차례를 기다려 각 과목 담당교사와 마주 앉아 자기 아이의 성적과 학습태도 등에 관하여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미술 교사와 마주 앉아서는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젊은 여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미술시간에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키지 않느냐구요? 그건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 유치원생에게,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아동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과 미적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렇습니다. 석고 데생은 나중에 미술학교에 가서 하면 되고, 실제로 미술학교에선 많이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동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켜선 안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모델을 주입시켜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석고상은 하나의 모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지리가 아닙니다. 석고상을 보고 데생을 하라고 하면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 위험이 있고 따라서 창조적 개성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을 놓고 그리게 하면 아동들끼리 그린 것을 서로 비교합니다. 아동들끼리 우열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특히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녀의 미소지은 모습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녀는 교육학자도 아니었고 교육부장관도 아니었고 일개 중학교의 미술교사였지만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두 아이는 데생 시간이 있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석고 데생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사생대회 같은 것도 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그린 그림 중에는 '나의 집', '나의 식구', '나의 꿈' 등이 있었다. '나'가 앞서 있었다. 따라서 아동마다 서로 다른 그림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린 것을 아이들끼리 비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미술공책의 왼쪽 면에 시를 받아쓰게 했고 오른쪽 면에 그 시에 대한 느낌을 그리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바다는 너의 거울...'로 시작되는 보들레르의 '바다'라는 시를 읽혔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미술교육은 '똑같이 그리기'도 아니고 '잘 그리기'도 아니었다. '창조적 개성'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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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극단적인 도구적 이성들이 '영어 공용어화' 를 주장하고 나섰다.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세계시민'이니 하더니 이젠 아예 말까지 영어로 하자고 주장한다. 세계화 현실에 '적응'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대한 광신적 추종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나라말 사랑과 나라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등한시 해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두려운 현상이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어 공용화 주장의 근원지를 찾아가면 필히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앵글로 색슨계의 신자유주의 전파지들과 만날 것이다. 그들이 희망사항처럼 떠들고 있는 얘기를 한국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한국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한 푼어치의 고려도 없이 앵무새처럼 따르고 있다. 

한국인들이 모두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는 영어 공용어화론자들의 꿈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뒤에 말으 꺼내도 꺼내야 되지 않는가. 진중권씨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런 농담같은 몽상의 소리가 '진지한 담론으로 행세하는 우리 지성계의 수준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를 폭넓게 소개하면서 논쟁을 유도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가치를 실어주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많은 비판이 나왔으므로 나는 몇 마디만 덧붙이겠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문화, 전통, 역사, 민족, 공동체, 사회통합, 삶의 방식, 의사소통에 나라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려 한다. 영어공용을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음을 알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그들의 '극단적 도구적 이성'에서 '극단'을 빼고 '도구적 이성'만을 빌려와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어설픈 능력과 그들의 도구적 이성만으로도 영어공용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인지 짚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은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북한은 어차피 그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듯하니 논외로 하고 남한 인구만 따져도 비교 되상이 되지 않는다. 또 한국의 다행스럽게도 반세기 동안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도 아니고 3세기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도 아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영어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몇 %나 될까? 1%? 2%? 아주 후하게 잡아도 3%겠다. 나머지 97%를 2등국민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요르단은 아랍국가에서 몇 안 되는 영어공용 시행국에 속하는데, '소수의 영어 소통 가능자=1등국민' '다수의 소통 불가능자=2등국민'의 꼴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영어공용 주장자들이 설마 이런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오히려 그들은 영어 공용을 통하여 불평등한 한국 사회를 평등하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의심은 하지 않겠는데, 다만 기회 균등한 영어교육을 통해 불평등의 개선을 진정으로 꿈꾼다면 유치원부터 학비 일절을 국비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먼저 나왔어야 했던 것 아닐까?

영어공용 주장은 국민 대다수가 영어소통 능력을 갖게 된다는 확신이 섰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이 점은 영어 공용론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면 동원체제를 꼭 필요로 한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한국에서 영어 교육을 위해 공들여온 노력과 시간을 그 결과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왔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별게 아니었다. 예컨대 복거일 씨도 영어로 소설을 쓰지 못하고 한국어로 쓰고 있다. 지금까지의 영어공부가 (산) 공부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그래서 더욱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고 응수하겠지만, (산) 공부가 될 수 없었던 까닭을 먼저 알아야 한다. 실제 살아가면서 사용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영어교육을 하지만 영어소통이 안되는 이유도 똑같다.

그리고 말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린다.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7년 동안 프랑스 말만 사용하던 아이가 한국에 가더니 5개월만에 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어렸을 때 익혔더라도 성장한 다음에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는 게 말인데, 어렸을 때부터 익히지 않으면 익히기 어려운게 또한 말이다. 말은 자전거타기나 성행위하곤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영어공용은 국민들의 삶 속에 계속적으로 영어를 강제하지 않는 한 그 실현가능성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강제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영어공용을 하고 있는 나라는, 앵글로색슨계를 빼면, 과거에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뿐이라는 사실도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가 가깝다는 것과, 한국어와 영어 사이가 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어를 강제하기 위해선 일본 제국주의보다 더 극심한 동원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의 모순이 드러난다.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 체제에서나 가능한 동원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태어나는 신생아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가?어디서?가르칠 것인가?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가 아기에거 영어를 모어로 전달할 수 없다. 신생아들을 탁아소에 집합시켜 마마, 파파부터 가르칠 것인가? 결국 또 동원인데, 이 동원을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 비용은 누가 대고 조직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을 가르칠 영어교사들은 확보되어 있는가?

백번 양보하여 탁아소도, 교사도, 비용도 해결된다고 치자. 또 국민 모두 영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고 치자. 몇년이 걸릴까? 강원도에서 제주까지 '나는 한국말은 잘 못하고 영어를 잘해요'라고 영어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과연 몇 년이 걸릴까. 50년? 100년? 200년? 교육을 백년지계라 했거늘, 하물며 말을 하나 더하기 위함이랴! 그런 사이에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서 예컨대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가 된다면? 그때 중국어 공용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그 땐 중국에서도 영어공용 중일 것이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중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말씀이다.

이렇게 그들의 도구적 이성으로 판단하더라도, 영어공용 주장이란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헛소리이며 한낱 공허한 현실추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도구적 이성은 영어를 보급하기 위한 정열, 시간, 돈이 있다면 그 정열과 시간과 돈을 수학, 물리 등 기초과학과 기술교육을 위해 쏟으라고 말한다. 수학은 세계보편적인 기호체계이며 물리또한 만국공통이다. 그리고 영원하다. 세계체제의 중심부가 미국에서 어디로 이동하든 상관없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것도 밑바탕을 파고 들어가면 영어 능력보다는 수학, 물리 그리고 기술이 좌우하는 것이다. 예컨대 실리콘 밸리나 빌 게이츠의 겉은 영어지만, 속은 온통 수학, 물리, 기술이다. 영어로는 다만 카피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남들이 수학, 물리 실력을 쌓고 기술을 익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영어를 익히며 그들의 뒤나 쫓아다닐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 앞으로 영어공용을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한국말보다 영어로 발표하기 바란다. 영어 소통이 비교적 잘되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그런 주장을 펴고자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영어로 발표할 것이다. 그만큼 영어 독자가 많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나라들에서 영어공용을 주장한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스웨덴의 공용어는 스웨덴어분이고 노르웨이의 공용어는 노르웨이어뿐이며, 덴마크의 공용어는 덴마크어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영어와 아주 가까워서 배우기 쉬운데도 그렇다. 왜 그들은 영어공용을 주장하지 않는지, 아니면 못하는지 한 번 살펴보라.

영어공용을 주장하는 글을 한국말로 써서 발표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영어로 쓸 필자도, 읽을 독자도 없는 곳에서 영어 공용을 주장하고 있으니 실로 우습지 아니한가? 부디 영어공용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한국인 독자를 위한 'Literature and society'같은 영문 잡지가 생기면 거기에 발표하라. 그Literature가 한국문학인지 미국문학인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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