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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4.25 2008.04.25_영어공용화론

급기야 극단적인 도구적 이성들이 '영어 공용어화' 를 주장하고 나섰다.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세계시민'이니 하더니 이젠 아예 말까지 영어로 하자고 주장한다. 세계화 현실에 '적응'하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대한 광신적 추종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나라말 사랑과 나라말의 중요성에 대하여 등한시 해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실로 두려운 현상이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어 공용화 주장의 근원지를 찾아가면 필히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앵글로 색슨계의 신자유주의 전파지들과 만날 것이다. 그들이 희망사항처럼 떠들고 있는 얘기를 한국의 신자유주의 신봉자들이 한국의 조건과 상황에 대한 한 푼어치의 고려도 없이 앵무새처럼 따르고 있다. 

한국인들이 모두 영어를 잘하면 좋겠다는 영어 공용어화론자들의 꿈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 꿈이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검토한 뒤에 말으 꺼내도 꺼내야 되지 않는가. 진중권씨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런 농담같은 몽상의 소리가 '진지한 담론으로 행세하는 우리 지성계의 수준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주의를 폭넓게 소개하면서 논쟁을 유도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지만,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가치를 실어주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이미 많은 비판이 나왔으므로 나는 몇 마디만 덧붙이겠다. 나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문화, 전통, 역사, 민족, 공동체, 사회통합, 삶의 방식, 의사소통에 나라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으려 한다. 영어공용을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음을 알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그들의 '극단적 도구적 이성'에서 '극단'을 빼고 '도구적 이성'만을 빌려와 그들 주장의 허구성을 밝히고자 한다. 나의 어설픈 능력과 그들의 도구적 이성만으로도 영어공용 주장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소리인지 짚어낼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은 싱가포르 같은 도시국가가 아니다. 북한은 어차피 그들의 눈에 띄지도 않는 듯하니 논외로 하고 남한 인구만 따져도 비교 되상이 되지 않는다. 또 한국의 다행스럽게도 반세기 동안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도 아니고 3세기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도 아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영어 소통이 가능한 사람이 몇 %나 될까? 1%? 2%? 아주 후하게 잡아도 3%겠다. 나머지 97%를 2등국민으로 남겨둘 수는 없다.

요르단은 아랍국가에서 몇 안 되는 영어공용 시행국에 속하는데, '소수의 영어 소통 가능자=1등국민' '다수의 소통 불가능자=2등국민'의 꼴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영어공용 주장자들이 설마 이런 상황을 부러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오히려 그들은 영어 공용을 통하여 불평등한 한국 사회를 평등하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주장까지 펼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의심은 하지 않겠는데, 다만 기회 균등한 영어교육을 통해 불평등의 개선을 진정으로 꿈꾼다면 유치원부터 학비 일절을 국비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먼저 나왔어야 했던 것 아닐까?

영어공용 주장은 국민 대다수가 영어소통 능력을 갖게 된다는 확신이 섰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이 점은 영어 공용론자들도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자면 동원체제를 꼭 필요로 한다. 왜 그럴까? 지금까지 한국에서 영어 교육을 위해 공들여온 노력과 시간을 그 결과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여왔지만 결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별게 아니었다. 예컨대 복거일 씨도 영어로 소설을 쓰지 못하고 한국어로 쓰고 있다. 지금까지의 영어공부가 (산) 공부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그래서 더욱 영어 공용어화가 필요하다고 응수하겠지만, (산) 공부가 될 수 없었던 까닭을 먼저 알아야 한다. 실제 살아가면서 사용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도 영어교육을 하지만 영어소통이 안되는 이유도 똑같다.

그리고 말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곧 잊어버린다. 프랑스에서 태어나서 7년 동안 프랑스 말만 사용하던 아이가 한국에 가더니 5개월만에 다 잊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처럼 어렸을 때 익혔더라도 성장한 다음에 사용하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는 게 말인데, 어렸을 때부터 익히지 않으면 익히기 어려운게 또한 말이다. 말은 자전거타기나 성행위하곤 다른 것이다.

따라서 영어공용은 국민들의 삶 속에 계속적으로 영어를 강제하지 않는 한 그 실현가능성이 없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인에게 일본어를 강제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재 지구상에서 영어공용을 하고 있는 나라는, 앵글로색슨계를 빼면, 과거에 영국과 미국의 식민지였던 나라들뿐이라는 사실도 이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가 가깝다는 것과, 한국어와 영어 사이가 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영어를 강제하기 위해선 일본 제국주의보다 더 극심한 동원체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의 모순이 드러난다.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 체제에서나 가능한 동원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태어나는 신생아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가?어디서?가르칠 것인가?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가 아기에거 영어를 모어로 전달할 수 없다. 신생아들을 탁아소에 집합시켜 마마, 파파부터 가르칠 것인가? 결국 또 동원인데, 이 동원을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 비용은 누가 대고 조직은 어떻게 하는가? 그들을 가르칠 영어교사들은 확보되어 있는가?

백번 양보하여 탁아소도, 교사도, 비용도 해결된다고 치자. 또 국민 모두 영어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고 치자. 몇년이 걸릴까? 강원도에서 제주까지 '나는 한국말은 잘 못하고 영어를 잘해요'라고 영어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과연 몇 년이 걸릴까. 50년? 100년? 200년? 교육을 백년지계라 했거늘, 하물며 말을 하나 더하기 위함이랴! 그런 사이에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서 예컨대 중국 주도의 세계체제가 된다면? 그때 중국어 공용을 다시 시작해야 하나? 그 땐 중국에서도 영어공용 중일 것이라고? 어림없는 소리다. 중화에 대해 전혀 모르는 말씀이다.

이렇게 그들의 도구적 이성으로 판단하더라도, 영어공용 주장이란 자가당착에 빠져 있는 헛소리이며 한낱 공허한 현실추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의 도구적 이성은 영어를 보급하기 위한 정열, 시간, 돈이 있다면 그 정열과 시간과 돈을 수학, 물리 등 기초과학과 기술교육을 위해 쏟으라고 말한다. 수학은 세계보편적인 기호체계이며 물리또한 만국공통이다. 그리고 영원하다. 세계체제의 중심부가 미국에서 어디로 이동하든 상관없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것도 밑바탕을 파고 들어가면 영어 능력보다는 수학, 물리 그리고 기술이 좌우하는 것이다. 예컨대 실리콘 밸리나 빌 게이츠의 겉은 영어지만, 속은 온통 수학, 물리, 기술이다. 영어로는 다만 카피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남들이 수학, 물리 실력을 쌓고 기술을 익혀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영어를 익히며 그들의 뒤나 쫓아다닐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 앞으로 영어공용을 주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한국말보다 영어로 발표하기 바란다. 영어 소통이 비교적 잘되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같은 나라에서 그런 주장을 펴고자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영어로 발표할 것이다. 그만큼 영어 독자가 많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 나라들에서 영어공용을 주장한다는 소리가 나온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스웨덴의 공용어는 스웨덴어분이고 노르웨이의 공용어는 노르웨이어뿐이며, 덴마크의 공용어는 덴마크어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영어와 아주 가까워서 배우기 쉬운데도 그렇다. 왜 그들은 영어공용을 주장하지 않는지, 아니면 못하는지 한 번 살펴보라.

영어공용을 주장하는 글을 한국말로 써서 발표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영어로 쓸 필자도, 읽을 독자도 없는 곳에서 영어 공용을 주장하고 있으니 실로 우습지 아니한가? 부디 영어공용을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조금 더 기다렸다가 한국인 독자를 위한 'Literature and society'같은 영문 잡지가 생기면 거기에 발표하라. 그Literature가 한국문학인지 미국문학인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Posted by 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