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촘스키가 가장 혐호하는 지적 작업의 현장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나의 정치적, 학문적 작업의 대상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은 내 연구에 대해 늘상 글을 쓰고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프랑스 지식인 세계의 전형적인 유아적 속성일 뿐입니다." 그의 주장은 이어진다. "비록 프랑스인들은 일부 탁월한 언어학자와 과학자, 무정부주의자, 기타 인사들을 자랑하지만, 매우 편협하고 상당히 일천한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60년대와 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거의 정치 강연을 하지 않았습니다. 독단에 근거한 왜곡이 너무 심해서 강연을 하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였으니까요"(1994.05.30. 편지). 알튀세, 바슐라르, 보봐르, 까뮈,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사르트르, 세레스 등의 인물들은 특정 부류의 존경을 받고 있지만, 촘스키는 이들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의도는 일부 프랑스 이론가들에게 부여된 스타의 지위와, 그들이 확립한 사조의 학설에 부여되는 존경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언어와 정치학'에서 그는 실존주의, 구조주의, 라캉의 철학과 해체주의에 대해 그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첨언하자면 미국인들에게도, 촘스키가 거부하는 극단적 숭배를 조장하는 책임이 똑같이 있는 것 같다. 미국의 학계는 종종 이러한 경향에 부화뇌동하여, 천문학적인 보수로 주요 석학들을 고용하고, 또 그들의 충실한 추종자들을 선발함으로써 특정한 운동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 혹은 프랑스적 지식인들은 촘스키의 글이 현재의 정치 사조의 섬세함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시대에 뒤처진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프랑스인들이 자신들 앞에 놓인 것을 제대로 보려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어떻게 진실을 말하고,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며, 최소한의 이성을 갖춘 기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대답한다.(1995.03.31. 편지) 촘스키는 또한 프랑스 지식인들은 프랑스 밖에서 이루어진 업적과 상호 교류하기를 거부해 왔고, 그 결과 프랑스의 엘리트는 폐쇄화, 퇴행화 되었다고 공격한다. 촘스키는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가령 1930년대 이후 전세계에서 연구되었던 비엔나 실증주의 철학은 프랑스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 학파의 주요 저작들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불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프랑스 생물학자들은 1970년대까지도 다윈의 진화론 이전 단계에 머물렀으며, 대부분의 독일 철학은 지금도 프랑스에 소개되고 있지 않다. 촘스키의 견해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유례없는 편협성과 학문적 억압이 횡행하고 있으며, 이 현상은 학문 분야 전반에 걸쳐 있다. "나치 점령 시절의 프랑스에 대한 진실이 미국의 연구로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놀라움과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곳에서는 사실이 거의 완전하게 억압되어 왔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대부분 억압되고 있습니다."(1995.03.31. 편지)

촘스키는 언어와 상호작용에 관한 프랑스식 연구에 반대하며, 그 요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도 적용된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의 진술은 막연한 전문용어로 포장되고, 그런 다음 '이론'의 지위로 격상된다. 촘스키는 20세기의 학문적 업적으로 간주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에 대해 지금까지 시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부르디외와 리오타르를 지목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언어적 상황에는 권력구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렇게 자명한 이치를 놀라운 것으로 간주하여 갖가지 어휘로 포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지식인 뿐입니다. 정직한 사람들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포장을 벗기고 가능한 한 무게를 줄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문헌연구를 진행하는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로부터 도움을 청하기도 하면서 상호 협력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리오타르와 포스트모던 시대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하찮은 것들과 자기만족적인 무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방대한 담론구조에 감추어진 어떤 진실의 씨앗을 감지하려 합니다. 그것은 정말로 단순한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무엇인가를, 아마도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나의 단순함에 대해 사과해야겠지요. 어쩌면 중요한 요인을 간과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나는 어려운 문제들을 이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른 어려운 분야들, 이를테면 양자역학 같은 분야에 대해서는 친구들과 동료학자들이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에는 아무도 나에게 그것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없고, 나 역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전에 알려진 것과는 완전히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간지능이 생겨났는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나도 틀림없이 그 중 한 사람이겠지만, 적절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끝내 이 새로운 인간지능을 알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이미 말했듯이 나는 개방적입니다. 또다른 설명방식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귀담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1995.03.31. 편지)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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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사이에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이 미국의 사회과학과 인문학 분야에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촘스키는 이 사조에 대해 강한 부정적 견해를 구축했다. 그의 견해는 대학에서 지식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의 일이 왜 대부분 하찮거나 자기만족적인가에 대한 그의 생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그렇다면 촘스키의 학문이, 텍스트에 대한 구조주의적 접근 방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구조주의, 후기 구조주의, 시학, 문학에 대한 언어학적 분석이나 언어학적 논증의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에게까지 여전히 중요한 정보적 재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북미에서 언어학이 아닌 언어 연구는 소쉬르 이후의 모든 프랑스 이론가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무렵, 프랑스 언어 이론은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었다. 보드리야르, 부르디외, 데리다, 들뢰즈, 푸코, 가타리, 라캉, 리오타르 등의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물론 바르트, 토도로프, 크리스테바 등은 여전히 학계의 극단적 찬반 논쟁을 불러 일으키는 논쟁가로 남아 있었지만 새로운 자리를 점유하지는 못했다. 위의 사상가들은 이론의 방면에서 새로운 스타로 발돋움했고, 비록 다른 사상가들의 연구도 문학과 언어 연구의 목록에 포함되긴 했지만, 그래도 학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사람들은 바로 이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었다.
이론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 거의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가령 포스트모던 건축과 포스트모던 시학과 같이, 분야간의 이동이 있으면 더욱 복잡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촘스키의 정의는 다른 많은 학자들이 사용하는 정의와 일치하지 않았고, 따라서 긴장의 원인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이론가들을 촘스키와 관련하여 이해하는데 가장 도움을 주는 사람은 바로 크리스토퍼 노리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운동 전체에 대한, 그리고 보드리야르, 드만, 데리다, 리오타르 등의 작품에 대한 노리스의 상세한 비평은 말하자면, 촘스키의 다소 극적인 평가를 조심스럽고 논리적으로 풀어쓴 것이다. 특히 장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노리스의 비평은 촘스키의 입장을 잘 대변하고 있다. 노리스는 '무비판적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 그리고 걸프전'(1992)을 통해, 보드리야르의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논문에서 발견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과도함과 오류를 겨냥하여 절제된 논박을 전개하고 있다.

보드리야르의 주장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제 순전히 환상과 허구로 이루어진 외관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 진실은 계몽적 이성과 그런 류의 낡은 사상과 함께 사라지고 없다는 것, 현실은 오늘날 배가된 '시뮬라크라', 즉 현실-효과의 작용을 통해 혹은 그 작용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거짓된 외관만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인식론적 근거로든 사회.정치적인 근거로든 '거짓된' 모습을 비판하는 것의 무의미하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진리라고 주장하던 낡은 패러다임이 더 이상 최소한의 역동적인 힘, 다시 말해 설득력이나 수사적인 힘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그에 집착하기보다는 소위 포스트모던 조건과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촘스키가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무슨 말을 했을지 상상하기는 쉽다. 그의 데카르트주의와 사회적, 개인적 책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 이를테면 걸프전의 와중에 연합군이 폭격세례를 퍼부었던 바그다드 주민들의 편에 서서 투쟁하려는 그의 사명의식을 한번 생각해 보가.
노리스는 보드리야르의 사상을 '터무니없는 이론'에 근거한 '황당무계한 사상'이라고 비난하면서,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던 사상의 대변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또 그는 보드리야르를 극단주의자 범주에 귀속시키면서 오히려 데리다를 포스트모더니즘적 선명함의 모범으로 규정짓는다. 노리스는 데리다가 "유쾌한 수사학을 동원하여 실재와 진리와 계몽적 비판의 지배에 종말을 고하는, 간편한 포스트모더니즘 계보에 속한다"는 일반적 인식을 거부하면서, 오히려 데리다의 글이 "인식록적 질문과 함께 윤리적 해석 능력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며, 단지 그의 글이 참조문, 의도, 텍스트의 권위, 올바른 텍스트 읽기, 저자의 권위 등에 직접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에 그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오로지 이성의 힘으로, 상대방의 담론에 존재하는 맹점들에 면밀히 주목하면서, 그리고 절제된 논쟁방식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그들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전환시키는 탁월 한 기술을 사용하여 논쟁을 이끌어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리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관련 텍스트들을 먼저 검토하지 않거나, 충분한 시간과 흥미를 가지고 이들 서적의 복잡한 철학적 전사, 그 속에 감춰진 공리들, 전문화된 논쟁방식 등을 파악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하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는 또 이렇게 덧붙인다. "오해가 발생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해석방법이 판이한 이론가들, 다시 말해 아주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흥미와 우선순위를 가진 미국과 영국의 이론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글을 열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촘스키는 보드리야르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금석이고, 그 결과 그의 저술도 가치가 있다는 노리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점을 제외한다면 두 사람의 의견은 대개 일치한다. 촘스키는 자신과 노리스가 '같은 편'에 있다고 말하면서 "보드리야르에 관해서는 노리스의 비평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1995.03.31. 편지). 노리스는'무비판적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지식인들, 그리고 걸프전'에서 "촘스키의 주장에서 발산되는 뛰어난 설득력은 이성적 근거에 마음을 열어둔 독자들에게 그의 주장이 쉽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만든다"고 쓰고 있다. 사실 촘스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문가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조 전체를 무시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주류 언어학이나 정치적 저항의 영역은 문학연구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유의 현란한 언어로 촘스키의 감각을 자극하는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인정한다. "적어도 데리다와 라캉은 읽어야 합니다. 나 자신도 심리분석가들을 위한 강연에 기초한 논문에서 라캉의 초기 작품을 인용한 적이 있고, 이것은 '규칙과 표상'에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을 진지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내가 그들의 저서를 통해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나는 크리스테바를 한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약 20여 년 전에 나를 만나기 위해 연구실로 왔었지요. 그때 그녀는 마치 광적인 마오쩌뚱주위자 같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1995.03.31 편지)

촘스키가 성공적으로 사귄 유일한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미쉘 푸코이다. 푸코는 사후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했다. 1971년 촘스키와 푸코는 네델란드의 공영방송에 함께 출연했다. 비록 촘스키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적 상대주의, 자아도취, 이기적인 언어의 러다이티즘 등을 들어 푸코의 견해에 경멸감을 드러냈지만, 푸코는 촘스키와의 대면에서 비교적 상처를 입지 않았다. 촘스키와 푸코는 정의와 인간의 본성이 역사적으로 우발적인가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종종 의기투합했다. 노리스의 말을 들어보자.

푸코와 촘스키는 어느 정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촘스키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동의한다. 즉 우리의 진리관이 넓게 보면 내재화된 선입견의 산물이라는 것,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조건 하에서 특정한 사실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이는 단지 그 사실들이 사회적 합의를 이룬, 또는 전문화된 기존의 믿음체계에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것, 검열은 종종 '위로부터' 가해지기 보다는 외적이고 강제적인 권력행사와는 무관하게 스스로 부과한 원칙과 규제를 통해 행해진다는 것, 촘스키 자신의 표현대로, '진실의 정치 경제학'에 이바지 한다는 거짓 선전에 연루되어 있긴 하지만, '정직한', '올바른 생각을 가진' 개인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거짓이나 권력의 남용에 대한 저항은 그 시대에 소통되고 이용가능한 정보적 출처인 '담론체계'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는 것 등이다.

촘스키는 대부분의 정치학 이론이 내포하는 사소하고 자기만족적인 속성을 강조하면서도, 역사연구에 이바지한 미쉘 푸코의 공로를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식인들이 자신의 경력과 권력욕 때문에 저지르는 위선적인 거짓행위만 피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당신이 언급한 푸코를 예로 들어봅시다. 전후 파리의 괴상한 문화에서 그가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게 되었다는 점과 지식인이라는 괴상한 집단의 존경심을 유발시키는 데 필요한 현학적인 틀을 사용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푸코의 글에서 흥미로운 통찰력과 관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적어도 이러한 군더더기를 제거하면 무언가 남는게 있다는 점에서 여타 파리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특이한 존재입니다.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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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지식인 사회에는 패배감이 스며들었지만, 촘스키는 이에 물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후회의 여지가 없다. 사실 그의 저서에는 가장 정확한 20세기 분석이 담겨 있다. 그러나 미국 정책에 관한 그의 비판은 과거나 현재나 주류 언론에서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역사나 정치를 가르치는 교사와 교수들에 의해서도 거의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 정치학과에서는 베트남-냉전-중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그의 자료들을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과 관련해서, 특히 베트남 문제와 관련해서 촘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주류 언론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베트남전에 관한 나의 비판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인정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은 좌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좌파에서 누가, 베트남 전쟁을 미국과 남베트남의 전쟁이라고, 1970년대 초까지는 미국이 거의 승리했던 전쟁이라고 설명하고 있거나 설명했던 적이 있습니까?(1995.03.31.편지)" 베트남 폭격과 파괴에 관해 당시에 만연했던 비판적 시간을 촘스키는 이렇게 요약한다. "주류 언론의 스펙트럼 내에서 가장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때, '베트남전은 선행을 베풀기 위한 어설픈 노력'으로 시작되었으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재난'으로 끝난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의 1964년 공격을 '방어행위'라고 지칭하며 지지했던 이단자는, 전쟁 후에도 자신의 입장이 끝내 옳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좌파 내에서의 일반적인 견해는, 베트남인들이 전쟁에서 승리했고 미국이 패했다는 것입니다." 촘스키는 다시 한번 자신이 배제되었음을 강조한다. "나의 견해는 에드워드 허먼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장은 전쟁 발발로부터 1973년 평화조약에 이르는 그 중요한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공동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발표한 자세한 자료들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1995.03.31.편지)."


물론 촘스키와 그의 견해에 공감하던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반대하던 초기에 훨씬 더 심하게 소외되었다. 촘스키는 미국 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추진한 인도차이나식 침략방식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것을 예견했다. 엘 살바도르, 니카라구아, 트리폴리, 이라크 등을 생각해 보면 이 예견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 관한 대부분의 재평가는 미국 정부가 저지른 실책, 대개는 전술적 실책들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이러한 평가들은 종종 철저한 평가로 간주될 뿐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이 평가가 수용되는 것 자체가 미국 정치체제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정치체제가 스스로의 실수를 인정할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촘스키의 견해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베트남에서 실수를 범했다고 비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실수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내 비판의 화살은 언제나 그들이 의도했던 것, 그리고 대개 성취했던 것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도 분명 아프가니스탄에서 실수를 범했지만, 나의 비난은 그들의 침략과 만행에 대한 것이었지 그들의 실수에 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본질과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러시아 공산당의 인민위원에게는 중요했겠지요. 우리의 이데올로기 체제 안에서 누군가가 '실수' 이상의 어떤 것을 비판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독재국가인 러시아가 좀 더 개방적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1995.03.31.편지)

촘스키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베트남 개입을 문제삼고 나왔을 때에도, 그들은 촘스키의 글에 깔려 있는 핵심을 간과하고 지엽적인 문제만을 취하곤 했다. 그나마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미국이 품고 있던 근본적으로 반도덕적인 목표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를 들어, 1973년 12월 21일자 '타임즈 문학판'에서 '국가의 이유'와 '밀실의 남자들'의 서평을 발표한 저자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사수한 문제를 거론했다. 즉 이 책은 출판과 거의 같은 시기에 공개된 자료들, 특히 펜타곤 서류 사건의 관련 자료에 근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이 출간되기 오래 전에 쓰여졌으며, 출판사의 결정에 의한 것임에도 다른 제목의 두 권으로 발행되었다고 비난했을 뿐 아니라 촘스키가 원고를 완벽하게 수정하지도 않았다는 등의 주장을 폈다. '밀실의 남자들'에 대한 나이젤 영의 서평은 1974년 '타임즈 고등교육 부록'에 실렸다. 나이젤 영도 촘스키의 문체를 물고 늘어졌다. 그는 촘스키의 책이 학문적 모습을 취하고는 있지만, 논쟁적이라고 폄하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촘스키 읽기'에 대한 서평이 '타임즈 문학판'에 게재되었다. 서평의 저자인 찰스 타운젠드는 촘스키의 스타일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이 책의 열정적인 전개 속도, 참고 문헌과 세부적 설명들의 과도함을 비판했고, 그 방식은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첫머리에서 독자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비난했다.

문체나 장르에 대한 이러한 집착은 촘스키 글의 핵심적 주장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그럼으로써 인텔리겐차는 공식적인 학설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는 촘스키의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다. 1973년 12월 21일자 '타임즈 문학판'에 실린 서평의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촘스키가 인도차이나에 대한 미국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들춰냈고 미국의 행정부가 아시아에서 신과 같은 역할을 행하게 된 경위를 폭로하고 있다고 회고한다. 이 평론가는 아시아의 농촌 지역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공격이 의도적이고 잔악하다는 사실을 파헤친 촘스키의 용기를 너그럽게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평은 글의 주제를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 서평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데 덜 오만하고 보다 자비로운 방법이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치른 대가는 성취한 목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촘스키와 허먼의 견해를 무시하고 있다.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냉전에서도 그랬다. 비록 냉전의 유지는 무의미해 보였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를 분할했고 자국의 군수공장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촘스키의 저서가 비슷한 내용을 머크레이커들의 글과 구분되는 점은 베트남전을 몰고 온 사고방식이 이미 제도적으로 깊이 뿌리내린 상태임을 매우 일관성 있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정부관리도 미래의 정권이 저지를 잔혹 행위를 막을 수 있는 진정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제국주의간 권력투쟁에서 인간적인 해결방법과 교훈은 대부분 차단되어 제 역할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 관리들이 배울 수 있다고 입증된 것은 고작해야 어떻게 하면 전술적 실수를 줄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하면 전술적 실수를 줄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어떻게 하면 좀 더 살인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 뿐이다. 촘스키를 논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거의 일률적으로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1973년 '타임즈 문학판'의 논평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역시 제국주의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상투적인 암시로 글을 끝맺었다.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Noam Chomsky, A life of dissent)'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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