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그렇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나는 내 귀로 직접 들은 얘기라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과거에는 분명한 사실로 존재했던 것이 순식간에 애매한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었다. 한두 시간도 채 못되어 전설같은 이야기가 생겨나고, 곧 이어 허황된 이야기가 퍼지면서 분명한 사실이 괴상한 이론의 산더미 아래 파묻히게 된다. 이 도시에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하지만 그것도 믿을 수 없는 때가 많다. 특히 이곳에선 외견 상 눈에 보이는 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매순간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기 때문에 어떤 것들을 보기만 해도 우리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 없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보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눈을 돌리거나 아예 감아버리는 게 속 편할 때가 많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정말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안서고,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그저 상상한 것은 아닌지, 다른 것과 혼동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예전에 봤던 것을, 어쩌면 예전에 상상했던 것을 떠올린 것은 아닌지...


*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중에서...



+0.  쉬면서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들을 다시 읽었다...


+1.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느 곳의 이야기임을 바탕으로 하고 읽어 넘겼었는데...

최근에 다시 읽으며...요즘 뉴스를 보고, 읽으며 느꼈던 감정이 교차함을 깨닫는다...


아....아....

Posted by GIN :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어쩔수 없다. 괜한 호들갑 없이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털썩 앉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먹을 것이 무론 주된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아주 상세히 음식 얘기하는 소리를 누그든 자주 들을 수 있는 곧이 바로 이곳이다. 수프와 식욕을 돋우는 전채 요리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 갖가지 양념과 향료, 온갖 맛과 냄새, 요리의 준비 과정과, 갖가지 양념과 향료, 온갖 맛과 냄새, 요리의 준비 과정과 음식의 효과, 처음 혀끝에 느껴지는 맛에서 시작해 식도를 따라 위까지 들어가는 동안에 온몸을 감싸도는 평화로운 기분 - 이런 대화가 때로는 장시간 계속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대화에는 나름의 엄격한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절대 웃어서는 안된다. 배가 고프다고 티를 내서도 안된다. 소리를 질러서도 안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도 안된다. 간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음식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장이 난다. 이야기가 좋게 끝이 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온 정신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하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배고픔을 잊으면서 <기력을 돋우는 아늑한 분위기> 속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음식 이야기만 들어도 영양을 섭취하는 셈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의 정도에 맞추어 적절히 정신을 집중시키고, 이야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고자 하는 욕망을 고루 가질 때,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환영의 언어다.


*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중에서...



+0. 그래...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1. 차이...우리는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음식 이야기를 한다...


+2. 그래도...우리도 환영의 언어를 말한다...아주 자주...

Posted by GIN :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나는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써 그렇게 해 봤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리 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Posted by GIN :

에핑이 요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계속 그에게서 떼어놓을 줄 알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요구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들을 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심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에는 본래부터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사물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은 바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어했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원칙이었다. 겸손함, 인내, 정확성. 나는 그 일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 대신 일종의 정신적 훈련,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새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 7 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에핑을 상대로 한 내 첫번째 시도는 흐릿한 배경을 스쳐가는 한심할 만큼 모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터 쭉 보아 왔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소화전, 택시, 포장도로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런 것들은 내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의 가변성, 즉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로 같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모든 무생물은 분해되고 있었고, 모든 생물은 죽어가고 있었다. 격렬하고 열광적인 분자들의 운동, 물질들이 끊임없는 폭발과 충돌, 그리고 모든 사물의 표면 밑에서 끓어오르는 혼돈...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나는 언제나 머리가 욱신거렸다. 에핑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경고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 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 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처음에 했던 설명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혼자 있을 때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밤 동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방안의 사물들을 둘러보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표현할 수 없을까 알아보려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좋은 눈을 타고 나지 못한 사람은... 

훈련을 통해 보는 눈을 길들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풀린 눈에 힘을 한번 주고...

Posted by GIN :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열여덟살이었는데, 처음 9개월 동안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았지만-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시외 거주 신입생들이라면 누구나 구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 기간이 끝나자 웨스트 112번가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갔다. 그 뒤로 내가 마침내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할 때까지 3년 동안을 살았던 곳은 바로 그 아파트였다. 그러나 내게 닥쳤던 역경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라도 오래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파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 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온 방안이 흐릿한 누런 색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했지만, 나는 자신의 재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짓을 좀 이상스러워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나를 괴짜로 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이 만족감을 한번 생각해봐. 침대로 기어들어가 19세기 미국 문학 위에서 꿈을 꾸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의 만족감을, 음식 밑에 숨어있는 온전한 르네상스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는 즐거움을."


사실 나는 어느 책이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얘기를 꾸며 내는 솜씨가 대단했고, 비록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내가 끌어다 붙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내 상상적인 가구들은 1년 가까이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중략...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 하나하나의 문장은 똑같이 옳은 숫자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 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 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 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걳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같은 글을 일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탐험가의 옛 행로를 따라 그가 전인미답의 영토로 헤치고 들어갔듯이 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태양과 더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빛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상자에는 번호가 적히지도 않았고 쪽지가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 시기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 여행은 분리되고 이어지지 않은 유람 여행, 말하자면 보스턴에서 레녹스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수 폭포로, 케노샤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건너뛰는 식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지도 위를 이리저리 뛰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공백이 채워지고, 모든 거리가 주파될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책들은 전에 읽은 것들이었고, 또 어떤 책들은 빅터 삼촌이 큰소리로 읽어 준 것들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인간.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전에 읽었던 책들도 새로 읽는 책들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다 읽은 책 더미들이 방 귀퉁이에 탑처럼 쌓여 올라갔고, 나는 그런 탑들 가운데 하나가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마다 읽고 난 책들을 두 개의 쇼핑 백에 담아서 다음 번 등교길에 들고 나가 팔곤 했다. 캠퍼스 바로 맞은편의 큰길에는 중고 책들을 주로 거래하던 비좁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챈들러 서점이라는 책방이 있었다. 1967년 여름부터 1969년 여름 사이에 나는 그곳을 열 번 남짓 찾아갔는데, 그러면서 조금씩조금씩 내가 물려받은 책들을 없애버렸다. 그것이, 내 수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자는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허용한 단 한가지 행위였다. 나는 빅터 삼촌의 소유물이었던 것들을 팔아 치우는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음

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진 빚을 갚았고, 이제는 돈이 너무 궁해진 만큼 다음 단계를 밟아 책을 현찰로 바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였다.


문제는 제 값을 받고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챈들러는 값을 몹시 박하게 매겼을 뿐더러, 책을 이해하는 태도도 나와는 전혀 딴판이어서 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이란 글을 담는 용기라기보다는 글 그 자체였으므로 어떤 주어진 책의 가치는 물질적인 상태보다 정신적인 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서 귀퉁이가 접힌 호메로스의 책이 번질번질한 버르길리우스의 책보다 더 나았고, 파스칼의 저서 한 권이 데카르트의 저서 세 권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본질적인 구분이었지만 챈들러에게는 그런 구분이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책이 물건,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구두 상자나 변기 청소기나 커피 포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빅터 삼촌의 장서 가운데 일부를 가져갈 때마다 그 늙은이는 경멸스럽게 책들을 만지작거리고, 책 등을 훑어보고, 때가 묻었나 흠집은 없나 살펴보면서 내게 자기가 쓰레기 더미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챈들러가 게임을 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물건의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최저가를 제시하는 것. 헌 책 장수로 30년 동안이나 닳고 닳은 그는 얕잡아 보는 표정을 짓고, 못마땅한 것처럼 구시렁거리고, 이마를 찌푸리고, 혀를 차고,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젓고 하는 짓을 두루 써먹었다. 그런 행동은 내가 나 자신의 판단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그런 책들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네, 나한테 이 따위 것들을 가져와서 돈을 받아가겠다는 건가? 자네, 쓰레기를 치워가는 청소부한테서 돈을 받으려고 드는 건가?


나는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간해서는 반박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챈들러는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를 했고 아무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팔려고 애를 쓴 반면, 그는 언제나 사는 데 무관심했으니까. 또 내가 파는 데 무관심한 척을 해 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간단히 말해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팔지 못하는 것은 결국 속는 것보다도 더 안좋았다. 나는 책을 조금씩, 그러니까 한번에 열두 권이나 열다섯 권 이하로 가져가는 경우에 사정이 좀 나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권당 평균 가격이 약간씩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좀더 자주 그곳을 찾아가야 했는데, 나는 거래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국은 챈들러가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늙은이는 아예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거래를 끝낸 뒤에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너무 멍해서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전번에 찾아왔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챈들러 편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책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고객-공통점이라고 없는 낯선 사람들 중의 하나, 무작위의 뜨내기-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팔아치우는 동안 내 아파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상자를 열면 동시에 하나의 가구를 파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대는 해체되었고, 의자들은 줄어들어 사라졌고, 책상은 텅 빈 공간으로 위축되었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커져가는 제로가 되었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손에 잡힐 듯 갑자기 생겨나는 빈자리뿐이었다. 내가 외삼촌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실직적인 결과, 현실 세계에서의 영향이 생겨났다. 따라서 그 결과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해 갈 길이라고는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남겨졌고,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 방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었다. 말하자면 그 방은 나의 상태를 측정하는, 얼마나 많은 내가 남아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는 지를 측정하는 기구인 셈이었다. 나는 나 하나만의 극장에서 범인이자 증인, 배우이자 관객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절단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조각 한조각씩,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0.  무심코 집어들어...4년만에 다시 읽은 책...

지독한 문학적 건망증을 확인하다...


치기 어린 포그의 이야기와 사악하지만 흡입력있는 에핑의 이야기에 비해...

바버와의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이 날 만큼...어렴풋하다...


4년 전 처음 읽고 난 뒤의 감흥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4년 후 다시 읽고 난 후... 이제껏 읽은 폴 오스터의 글 중 제일 재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1.  그래도 정말로 좋았던 한 부분...


+2.  이사를 하고...박스를 두칸으로 쌓아올려서 옷장으로 쓰며 버티던 6개월이 문득 떠올라 미소짓다...  


+3.  자꾸 고약한 책방 주인의 얼굴에 메튜 페리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래서 첫인상이 무서운 거다... 



Posted by GIN :

다음 날 퀸은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에서 스틸먼의 책을 읽는 것으로 오전 시간을 보냈다.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은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맨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대리석 홀의 정적 속에서 마치 망각의 지하실로 들어가도록 허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책상 뒤에서 꾸벅꾸벅 졸고있는 직원에게 졸업생 카드를 내보인 뒤 그는 서가에서 책을 뽑아 가지고 3층으로 올라가 끽연실의 녹색 가죽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의 눈부신 5월 아침이 야외를 무작정 걸어보라고 유혹하는 것 같았지만, 퀸은 그런 생각을 떨쳐버린 뒤 의자를 돌려 창을 등지고 앉아 책을 펼쳤다.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 -유리의 도시' 중에서...


Posted by GIN :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그렇듯, 퀸 역시 범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살인을 한 적도, 물건을 훔친 적도 없었고, 그런 짓을 한 사람을 알지도 못했다. 또 경찰서에 들어가 본 적도, 사설탐정을 만나 본 적도, 범죄자와 얘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책과 영화와 신문에서 얻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퀸은 그것이 자기에게 불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관심이 끌리는 것은 그 이야기와 세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들과의 관계였으니까. 윌리엄 윌슨이 되기 전부터도 퀸은 대단한 추리 소설 애독자였다. 그는 추리 소설들이 대부분 형편없이 씌여졌고 거의 모두가 건성으로 하는 검증에도 남아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추리 소설의 형식에 마음이 끌렸다. 그가 읽으려고 들지 않은 것은 아주 드물게 보이는 말할 수 없이 형편없는 추리물뿐이었다. 다른 책들에 대한 취향은 아주 엄격해서 편협하다고까지 할 정도였던 반면, 추리 소설에 대해서라면 그는 여간해서 어떤 차별도 두지 않았다. 또 기분이 괜찮을 때는 별 어려움 없이 열 권이나 열두 권쯤을 내리 읽어 채울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를 사로잡고 있던 일종의 허기, 특별한 음식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었고, 그 허기가 채워질 때까지는 그는 읽기를 멈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책들에서 그가 마음에 들어 한것은 충실하고 경제적인 감각이었다. 제대로 된 추리 소설에서는 아무것도 낭비되지 않는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도 의미심장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의미심장하지 않은 것까지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은 의미심장한 것이 된다. 책의 세계는 가능성과 비밀의 모순으로 소용돌이치며 생명력을 얻는다. 눈에 보이거나 말해진 것 모두가,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이야기의 결과와 관련될 수 있기에 그 어느 것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핵심이 되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하나하나의 사건과 함께 책의 중심을 바꾼다. 그러므로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며, 책이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어느 한 범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탐정은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듣는 사람, 사물과 사건들의 늪을 헤치며 그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해 의미가 통하게 해 줄 생각과 관념을 찾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작가와 탐정은 서로 바뀔 수 있는 존재이다. 독자는 탐정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면서 지엽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것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경험한다. 그리고 마치 주위의 사물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기라도 하듯, 자기가 이제 그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 이상의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하기라도 하듯 그런 것 들을 알아차리게 된다. Private Eye. 퀸에게는 그 말이 3중의 의미를 지니과 있었다. 즉, 그말은 (조사자 investigator)를 의미하는(i)라는 글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살아 숨쉬는 육체에 감추어져 있는 조그만 생명의 싹인 대문자 (I)이기도 했고, 그와 동시에 작가의 육체적인 눈,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세상을 내다보고 그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도록 요구하는 눈이기도 했다. 지난 5년 동안 퀸은 그 동음이의어에 붙잡혀서 살아온 셈이었다.
 
* 폴 오스터 '뉴욕 3부작-유리의 도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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