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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13 2013.08.12_헌책 팔기 2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열여덟살이었는데, 처음 9개월 동안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았지만-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시외 거주 신입생들이라면 누구나 구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 기간이 끝나자 웨스트 112번가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갔다. 그 뒤로 내가 마침내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할 때까지 3년 동안을 살았던 곳은 바로 그 아파트였다. 그러나 내게 닥쳤던 역경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라도 오래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파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 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온 방안이 흐릿한 누런 색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했지만, 나는 자신의 재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짓을 좀 이상스러워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나를 괴짜로 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이 만족감을 한번 생각해봐. 침대로 기어들어가 19세기 미국 문학 위에서 꿈을 꾸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의 만족감을, 음식 밑에 숨어있는 온전한 르네상스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는 즐거움을."


사실 나는 어느 책이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얘기를 꾸며 내는 솜씨가 대단했고, 비록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내가 끌어다 붙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내 상상적인 가구들은 1년 가까이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중략...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 하나하나의 문장은 똑같이 옳은 숫자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 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 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 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걳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같은 글을 일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탐험가의 옛 행로를 따라 그가 전인미답의 영토로 헤치고 들어갔듯이 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태양과 더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빛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상자에는 번호가 적히지도 않았고 쪽지가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 시기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 여행은 분리되고 이어지지 않은 유람 여행, 말하자면 보스턴에서 레녹스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수 폭포로, 케노샤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건너뛰는 식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지도 위를 이리저리 뛰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공백이 채워지고, 모든 거리가 주파될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책들은 전에 읽은 것들이었고, 또 어떤 책들은 빅터 삼촌이 큰소리로 읽어 준 것들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인간.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전에 읽었던 책들도 새로 읽는 책들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다 읽은 책 더미들이 방 귀퉁이에 탑처럼 쌓여 올라갔고, 나는 그런 탑들 가운데 하나가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마다 읽고 난 책들을 두 개의 쇼핑 백에 담아서 다음 번 등교길에 들고 나가 팔곤 했다. 캠퍼스 바로 맞은편의 큰길에는 중고 책들을 주로 거래하던 비좁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챈들러 서점이라는 책방이 있었다. 1967년 여름부터 1969년 여름 사이에 나는 그곳을 열 번 남짓 찾아갔는데, 그러면서 조금씩조금씩 내가 물려받은 책들을 없애버렸다. 그것이, 내 수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자는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허용한 단 한가지 행위였다. 나는 빅터 삼촌의 소유물이었던 것들을 팔아 치우는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음

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진 빚을 갚았고, 이제는 돈이 너무 궁해진 만큼 다음 단계를 밟아 책을 현찰로 바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였다.


문제는 제 값을 받고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챈들러는 값을 몹시 박하게 매겼을 뿐더러, 책을 이해하는 태도도 나와는 전혀 딴판이어서 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이란 글을 담는 용기라기보다는 글 그 자체였으므로 어떤 주어진 책의 가치는 물질적인 상태보다 정신적인 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서 귀퉁이가 접힌 호메로스의 책이 번질번질한 버르길리우스의 책보다 더 나았고, 파스칼의 저서 한 권이 데카르트의 저서 세 권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본질적인 구분이었지만 챈들러에게는 그런 구분이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책이 물건,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구두 상자나 변기 청소기나 커피 포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빅터 삼촌의 장서 가운데 일부를 가져갈 때마다 그 늙은이는 경멸스럽게 책들을 만지작거리고, 책 등을 훑어보고, 때가 묻었나 흠집은 없나 살펴보면서 내게 자기가 쓰레기 더미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챈들러가 게임을 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물건의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최저가를 제시하는 것. 헌 책 장수로 30년 동안이나 닳고 닳은 그는 얕잡아 보는 표정을 짓고, 못마땅한 것처럼 구시렁거리고, 이마를 찌푸리고, 혀를 차고,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젓고 하는 짓을 두루 써먹었다. 그런 행동은 내가 나 자신의 판단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그런 책들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네, 나한테 이 따위 것들을 가져와서 돈을 받아가겠다는 건가? 자네, 쓰레기를 치워가는 청소부한테서 돈을 받으려고 드는 건가?


나는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간해서는 반박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챈들러는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를 했고 아무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팔려고 애를 쓴 반면, 그는 언제나 사는 데 무관심했으니까. 또 내가 파는 데 무관심한 척을 해 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간단히 말해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팔지 못하는 것은 결국 속는 것보다도 더 안좋았다. 나는 책을 조금씩, 그러니까 한번에 열두 권이나 열다섯 권 이하로 가져가는 경우에 사정이 좀 나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권당 평균 가격이 약간씩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좀더 자주 그곳을 찾아가야 했는데, 나는 거래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국은 챈들러가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늙은이는 아예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거래를 끝낸 뒤에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너무 멍해서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전번에 찾아왔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챈들러 편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책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고객-공통점이라고 없는 낯선 사람들 중의 하나, 무작위의 뜨내기-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팔아치우는 동안 내 아파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상자를 열면 동시에 하나의 가구를 파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대는 해체되었고, 의자들은 줄어들어 사라졌고, 책상은 텅 빈 공간으로 위축되었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커져가는 제로가 되었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손에 잡힐 듯 갑자기 생겨나는 빈자리뿐이었다. 내가 외삼촌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실직적인 결과, 현실 세계에서의 영향이 생겨났다. 따라서 그 결과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해 갈 길이라고는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남겨졌고,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 방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었다. 말하자면 그 방은 나의 상태를 측정하는, 얼마나 많은 내가 남아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는 지를 측정하는 기구인 셈이었다. 나는 나 하나만의 극장에서 범인이자 증인, 배우이자 관객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절단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조각 한조각씩,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0.  무심코 집어들어...4년만에 다시 읽은 책...

지독한 문학적 건망증을 확인하다...


치기 어린 포그의 이야기와 사악하지만 흡입력있는 에핑의 이야기에 비해...

바버와의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이 날 만큼...어렴풋하다...


4년 전 처음 읽고 난 뒤의 감흥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4년 후 다시 읽고 난 후... 이제껏 읽은 폴 오스터의 글 중 제일 재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1.  그래도 정말로 좋았던 한 부분...


+2.  이사를 하고...박스를 두칸으로 쌓아올려서 옷장으로 쓰며 버티던 6개월이 문득 떠올라 미소짓다...  


+3.  자꾸 고약한 책방 주인의 얼굴에 메튜 페리의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래서 첫인상이 무서운 거다... 



Posted by GI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