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인디언의 달력에 의하면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인 11월, 그 11월에 들어서면 나무들은 여름과 가을철에 걸쳤던 옷을 미련없이 훨훨 벗어 버린다. 나무들이 모여서 이룬 숲은 입동 무렵이면 겨울맞이 채비를 다 끝내고, 빈 가지에 내려앉을 눈의 자리를 마련해 둔다.
누가 시키거나 참견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물러설 줄 아는 이 오묘한 질서, 이게 바로 어김없는 자연의 조화다. 대립하거나 어긋남 없이 서로 균형을 잘 이루는 우주의 조화다.
*법정 스님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
11월이다...
한해의 6분의 1이 남았다...
썸머 타임이 끝났다...
올해는 봄, 여름이 별로더니...
가을이 좀 길고...청명하다...
'책 볼 기운이 없어 빨래를 하며 집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는 가벼운 하소연,
그러나 너의 낭랑한 전화 목소리는 아빠의 가슴에 단비를 퍼부었다. 전번에 네 편지에 외로움을 이겨 나가는 버릇이 생겼고 무엇이나 혼자서 해결하여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여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학문하는 사람에게 고적을 따를 수밖에 없다.
혼자서 일하고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거의 전부이기에 일상생활의 가지가지의 환락을 잃어버리고 사람들과 소원해지게 된다.
현대에 있어 연구생활은 싸움이다. 너는 벌써 많은 싸움을 하여왔다. 그리고 이겨왔다.
이 싸움을 네가 언제까지 할 수 있나,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그리고 너에게 용기를 북돋워준다는 것이 가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진리 탐구는 결과보다도 그 과정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특히 과학은 연구 도중 너에게 차고 맑은 기쁨을 주는 순간이 많으리라.
허위가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 이 직업에는 정당한 보수와 정당한 영예가 있으리라 믿는다.
네 편지에 너는 네가 아빠가 실망하게 변해 가지는 않나 생각해 본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빠가 싫어할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도 하였다.
남들이 너를 보고 무척 어려 보인다고들 하고, 대학 몇학년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다.
너는 아빠에게는 지금도 어린 소녀다. 네가 남에게 청아한 숙녀로 보이는 때가 오더라도 나에게는 언제나 어린 딸이다.
네가 대학 다닐 때 어떤 밤 늦도록 하디의 소설을 읽다가 내 방으로 와서 '수(Sue)가 가엾다'고 하였다.
네 눈에는 눈물이 어렸었다.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밖에 없다.
수와 같은 강한 여자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너는 디킨스의 애그니스같이 온아하고 참을성 있는 푸른 나무와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어 순조로운 가정 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 길인지, 아니면 외롭게 살며 연구에 정진하는 것이 네가 택해야 할 길인지 그것은 너 혼자서 결정할 문제다. 어떤 길이든 네가 가고 싶으면 그것이 옳은 길이 될 것이다.
요즘 틈이 있으면 화이트헤드와 러셀을 읽는다니 반가운 일이다.
그들은 둘다 수학에서 철학으로 올아간 학자들로 다른 철학자들보다 선명하고 모호한 데가 적으리라 믿는다.
과학을 토대로 하지 않는 철학은 기초 작업이 튼튼치 않은 성채와 같다.
한편, 과학자에게는 철학공부가 매우 유익하리라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은 광맥을 파 들어가는 것과 같이 좁고 깊은 통찰은 할 수 있으나 산 전체의 모습을 알기 어렵고 산 아래 멀리 전개되는 평야를 내려다볼 수는 없을 것이다.
너는 시간을 아껴 철학과 문학을 읽고, 인정이 있는 언제나 젊고 언제나 청신한 과학자가 되기 바란다.
안녕안녕 아빠.
잠 아니 올때는 리부륨 대신 포도주를 먹어라.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글은 읽는 당시 나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서 자주 많이 다르게 기억된다.
도대체 이 쓰레기같은 잡문들을 가지고 왜 노벨상 운운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피천득의 '인연'을 처음 읽을 때의 나는 참으로 팍팍했구나 한다...
얼마전에 법정스님의 글을 다시 읽고 감흥이 좀 달라서, 피천득의 수필집도 내친김에 다시 한번 집어들었다...
지나치게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글들이 대체로 여전히 와닿지 않고 내 감성의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름마냥 겉돌기만 하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드문드문 가슴을 두드리는 글들을 발견한다...
피천득씨가 딸에게 이 편지를 읽으며...
오랜만에 독일 온 첫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기억했다...
매번 규격 편지지 두 장을 꽉 채웠던 아빠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아빠의 딸에 대한 안쓰러움과, 염려, 걱정 그리고 자랑스러움과 믿음이...
피천득씨가 딸에게 보낸 편지에 담은 마음과 다르지 않으므로...
따로 편지를 교환할 만큼의 살뜰함은 없던 우리가족은...
동생과 내가 부모님 품을 한꺼번에 떠나오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아빠의 편지에서 아빠의 여림을 처음 읽고...
엄마의 카드에서 엄마의 유머를 처음 알고...
동생의 편지에서 동생을 믿게 되었다...
독일에 처음 온 몇해간은 간혹 펜을 들어 편지를 써서 부치기도 했었다...
편지가 끊어졌던 게 언제부터였는지...
갖은 괴로움을 견디면서도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의 하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몇몇 사람 이외에는 서로 자주 만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 살면 언제나 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다소 괴로움이 따르더라도 전화를 가짐은 불현듯 통사정을 하고 싶은 때, 목소리라도 들어보고 싶을 때, 이런 때를 위해서다.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전선이 아니라도 정의 흐름은 언제 어느데서고 닿을 수 있지마는.
피천득 수필집 '인연' 중에서...
* 비슷한 이유로 한국에 돌아가는 날을 꿈꾼다... 또다른 이유로 독일에서의 삶을 그리워하고 다시 꿈꿀지라도...
* 아이폰 새 시리즈 출시를 앞두고, 전화기가 오락가락한다... 통화 성능이 좀 떨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불편한 점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수신 기능이 영...떨어졌던 모양이다... 어느날 근 한달치 메세지를 폭탄으로 받고...놀라서 새벽잠을 설쳤더랬다...
사교적이지 못한 주인만큼이나... 내 전화기들도 대를 이어 족족 참...사교적이지 못하다...
밤으로는 동해바다 일대에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이 장관을 이룬다. 어족들은 눈부신 등불을 보고 무슨 잔치인가 싶어 모여들었다가 잡혀 한 생애를 마친다. 등불에 속는 것이 어찌 고기 떼만이랴. 인간의 도시마다 벌어지는 밤의 유흥업소, 번쩍이는 그 불빛 아래서 들뜬 기분에 흥청거리다가 무참히 한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들도 드물지 않다. 밤의 수상한 불빛에, 과장된 그 불빛에 속지 말아야 한다.
바다는 밤에도 잠을 자지 않는지 기슭에 밀려드는 파도소리가 내 베갯머리까지 아득히 들린다. 뒷산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마침내 저 바다에 이르러 함께 출렁거릴 것이다. 개인의 삶도 때가 되면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저 큰 생명의 바다에 이르러 하나가 되듯이.
*법정 스님 '새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기다' 중에서...
나이가 한 해 한 해 더 들어 다시 읽는 법정 스님 글의 감흥이 다르다... 피천득씨의 글도 지금 다시 읽으면 다르게 읽힐지...
동해바다, 오징어잡이 배, 집어등... 이 문구에 내 마음은 벌써 무슨 잔치인가 밤바다로 달려든다... 등불에 속는 것이 어찌 고기 떼만이랴..
가을은 차맛이 새롭다. 고온 다습한 무더운 여름철에는 차맛이 제대로 안 난다. 여름이 가고 맑은 바람이 불어와 만물이 생기를 되찾을 때 차향기 또한 새롭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 입듯이, 다기도 바꾸어 쓰면 새롭다. 여름철에는 백자가 산뜻해서 좋고 여름이 지나면 분청사기나 갈색 계통의 그릇이 포근하다. 여름철에는 넉넉한 그릇이 시원스럽고, 가을이나 겨울철에는 좀 작은 것이 정겹다. 무더운 여름철에 발효된 차는 그 맛이 텁텁하고 빛이 탁해서 별로지만, 가을밤 이슥해서 목이 마를 때 발효된 차는 긴장감이 없어 마실 만하다. *법정 스님 '가을에는 차맛이 새롭다' 중에서...
이 가을에는 다들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도 물러가고
산뜻한 가을하늘 아래서, 어깨를 활짝펴고 숨을 크게 쉬면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들꽃 같은 미소를 보내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법정 스님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네' 중에서
아침에 읽은 글에서 가을 내음을 맡았더래니...
출근길 아침 하늘에서 벌써 가을을 발견한다...
여름이 없는 2011년...
8월의 초입...독일은 벌써 가을이다...
지난주 이틀간 잠깐 날씨가 반짝 좋았다...
그래봤자...30도를 넘기지 못한 기온이었지만...
축제라도 되는 냥...기상캐스터가 햇빛 비치는 날 시내로 달려나가 사람들을 인터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