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그렇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나는 내 귀로 직접 들은 얘기라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과거에는 분명한 사실로 존재했던 것이 순식간에 애매한 것으로 바뀌기 때문이었다. 한두 시간도 채 못되어 전설같은 이야기가 생겨나고, 곧 이어 허황된 이야기가 퍼지면서 분명한 사실이 괴상한 이론의 산더미 아래 파묻히게 된다. 이 도시에선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하지만 그것도 믿을 수 없는 때가 많다. 특히 이곳에선 외견 상 눈에 보이는 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매순간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 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기 때문에 어떤 것들을 보기만 해도 우리 자신의 일부가 사라져 없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보는 것조차 위험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눈을 돌리거나 아예 감아버리는 게 속 편할 때가 많다. 그렇게 때문에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을 정말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안서고,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그저 상상한 것은 아닌지, 다른 것과 혼동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예전에 봤던 것을, 어쩌면 예전에 상상했던 것을 떠올린 것은 아닌지...
*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중에서...
+0. 쉬면서 오래전에 읽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책들을 다시 읽었다...
+1.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느 곳의 이야기임을 바탕으로 하고 읽어 넘겼었는데...
아무리 의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어쩔수 없다. 괜한 호들갑 없이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 털썩 앉아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먹을 것이 무론 주된 이야깃거리 중의 하나다. 사람들이 모여 앉아 아주 상세히 음식 얘기하는 소리를 누그든 자주 들을 수 있는 곧이 바로 이곳이다. 수프와 식욕을 돋우는 전채 요리에서 디저트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 갖가지 양념과 향료, 온갖 맛과 냄새, 요리의 준비 과정과, 갖가지 양념과 향료, 온갖 맛과 냄새, 요리의 준비 과정과 음식의 효과, 처음 혀끝에 느껴지는 맛에서 시작해 식도를 따라 위까지 들어가는 동안에 온몸을 감싸도는 평화로운 기분 - 이런 대화가 때로는 장시간 계속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런 대화에는 나름의 엄격한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절대 웃어서는 안된다. 배가 고프다고 티를 내서도 안된다. 소리를 질러서도 안되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어도 안된다. 간혹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음식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장이 난다. 이야기가 좋게 끝이 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온 정신을 다 쏟아 부어야 한다.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하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배고픔을 잊으면서 <기력을 돋우는 아늑한 분위기> 속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음식 이야기만 들어도 영양을 섭취하는 셈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의 정도에 맞추어 적절히 정신을 집중시키고, 이야기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믿고자 하는 욕망을 고루 가질 때,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나는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써 그렇게 해 봤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리 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에핑이 요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계속 그에게서 떼어놓을 줄 알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요구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들을 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심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에는 본래부터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사물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은 바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어했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원칙이었다. 겸손함, 인내, 정확성. 나는 그 일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 대신 일종의 정신적 훈련,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새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 7 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에핑을 상대로 한 내 첫번째 시도는 흐릿한 배경을 스쳐가는 한심할 만큼 모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터 쭉 보아 왔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소화전, 택시, 포장도로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런 것들은 내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의 가변성, 즉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로 같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모든 무생물은 분해되고 있었고, 모든 생물은 죽어가고 있었다. 격렬하고 열광적인 분자들의 운동, 물질들이 끊임없는 폭발과 충돌, 그리고 모든 사물의 표면 밑에서 끓어오르는 혼돈...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나는 언제나 머리가 욱신거렸다. 에핑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경고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 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 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처음에 했던 설명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혼자 있을 때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밤 동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방안의 사물들을 둘러보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표현할 수 없을까 알아보려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열여덟살이었는데, 처음 9개월 동안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았지만-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시외 거주 신입생들이라면 누구나 구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 기간이 끝나자 웨스트 112번가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갔다. 그 뒤로 내가 마침내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할 때까지 3년 동안을 살았던 곳은 바로 그 아파트였다. 그러나 내게 닥쳤던 역경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라도 오래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파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 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온 방안이 흐릿한 누런 색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했지만, 나는 자신의 재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짓을 좀 이상스러워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나를 괴짜로 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이 만족감을 한번 생각해봐. 침대로 기어들어가 19세기 미국 문학 위에서 꿈을 꾸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의 만족감을, 음식 밑에 숨어있는 온전한 르네상스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는 즐거움을."
사실 나는 어느 책이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얘기를 꾸며 내는 솜씨가 대단했고, 비록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내가 끌어다 붙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내 상상적인 가구들은 1년 가까이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중략...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 하나하나의 문장은 똑같이 옳은 숫자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 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 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 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걳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같은 글을 일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탐험가의 옛 행로를 따라 그가 전인미답의 영토로 헤치고 들어갔듯이 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태양과 더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빛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상자에는 번호가 적히지도 않았고 쪽지가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 시기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 여행은 분리되고 이어지지 않은 유람 여행, 말하자면 보스턴에서 레녹스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수 폭포로, 케노샤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건너뛰는 식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지도 위를 이리저리 뛰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공백이 채워지고, 모든 거리가 주파될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책들은 전에 읽은 것들이었고, 또 어떤 책들은 빅터 삼촌이 큰소리로 읽어 준 것들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인간.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전에 읽었던 책들도 새로 읽는 책들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다 읽은 책 더미들이 방 귀퉁이에 탑처럼 쌓여 올라갔고, 나는 그런 탑들 가운데 하나가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마다 읽고 난 책들을 두 개의 쇼핑 백에 담아서 다음 번 등교길에 들고 나가 팔곤 했다. 캠퍼스 바로 맞은편의 큰길에는 중고 책들을 주로 거래하던 비좁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챈들러 서점이라는 책방이 있었다. 1967년 여름부터 1969년 여름 사이에 나는 그곳을 열 번 남짓 찾아갔는데, 그러면서 조금씩조금씩 내가 물려받은 책들을 없애버렸다. 그것이, 내 수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자는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허용한 단 한가지 행위였다. 나는 빅터 삼촌의 소유물이었던 것들을 팔아 치우는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음
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진 빚을 갚았고, 이제는 돈이 너무 궁해진 만큼 다음 단계를 밟아 책을 현찰로 바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였다.
문제는 제 값을 받고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챈들러는 값을 몹시 박하게 매겼을 뿐더러, 책을 이해하는 태도도 나와는 전혀 딴판이어서 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이란 글을 담는 용기라기보다는 글 그 자체였으므로 어떤 주어진 책의 가치는 물질적인 상태보다 정신적인 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서 귀퉁이가 접힌 호메로스의 책이 번질번질한 버르길리우스의 책보다 더 나았고, 파스칼의 저서 한 권이 데카르트의 저서 세 권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본질적인 구분이었지만 챈들러에게는 그런 구분이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책이 물건,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구두 상자나 변기 청소기나 커피 포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빅터 삼촌의 장서 가운데 일부를 가져갈 때마다 그 늙은이는 경멸스럽게 책들을 만지작거리고, 책 등을 훑어보고, 때가 묻었나 흠집은 없나 살펴보면서 내게 자기가 쓰레기 더미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챈들러가 게임을 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물건의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최저가를 제시하는 것. 헌 책 장수로 30년 동안이나 닳고 닳은 그는 얕잡아 보는 표정을 짓고, 못마땅한 것처럼 구시렁거리고, 이마를 찌푸리고, 혀를 차고,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젓고 하는 짓을 두루 써먹었다. 그런 행동은 내가 나 자신의 판단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그런 책들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네, 나한테 이 따위 것들을 가져와서 돈을 받아가겠다는 건가? 자네, 쓰레기를 치워가는 청소부한테서 돈을 받으려고 드는 건가?
나는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간해서는 반박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챈들러는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를 했고 아무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팔려고 애를 쓴 반면, 그는 언제나 사는 데 무관심했으니까. 또 내가 파는 데 무관심한 척을 해 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간단히 말해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팔지 못하는 것은 결국 속는 것보다도 더 안좋았다. 나는 책을 조금씩, 그러니까 한번에 열두 권이나 열다섯 권 이하로 가져가는 경우에 사정이 좀 나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권당 평균 가격이 약간씩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좀더 자주 그곳을 찾아가야 했는데, 나는 거래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국은 챈들러가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늙은이는 아예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거래를 끝낸 뒤에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너무 멍해서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전번에 찾아왔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챈들러 편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책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고객-공통점이라고 없는 낯선 사람들 중의 하나, 무작위의 뜨내기-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팔아치우는 동안 내 아파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상자를 열면 동시에 하나의 가구를 파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대는 해체되었고, 의자들은 줄어들어 사라졌고, 책상은 텅 빈 공간으로 위축되었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커져가는 제로가 되었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손에 잡힐 듯 갑자기 생겨나는 빈자리뿐이었다. 내가 외삼촌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실직적인 결과, 현실 세계에서의 영향이 생겨났다. 따라서 그 결과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해 갈 길이라고는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남겨졌고,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 방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었다. 말하자면 그 방은 나의 상태를 측정하는, 얼마나 많은 내가 남아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는 지를 측정하는 기구인 셈이었다. 나는 나 하나만의 극장에서 범인이자 증인, 배우이자 관객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절단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조각 한조각씩,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0. 무심코 집어들어...4년만에 다시 읽은 책...
지독한 문학적 건망증을 확인하다...
치기 어린 포그의 이야기와 사악하지만 흡입력있는 에핑의 이야기에 비해...
바버와의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이 날 만큼...어렴풋하다...
4년 전 처음 읽고 난 뒤의 감흥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4년 후 다시 읽고 난 후... 이제껏 읽은 폴 오스터의 글 중 제일 재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마르탱은 파리 오페라좌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오페라좌의 지하에 지하수가 흐른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 지하수에서 송어를 기르고 있다. 파리 시내 한복판에, 그것도 오페라좌 밑에 송어 양식장이 생긴 것이다.
그의 직장 동료인 장 피에르는 마르탱의 기발한 부업(?)에 부러움과 흥미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동업(?)하자고 덤빌 사람이 아니었다. 프랑스인의 개성은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건물의 지하에서 송어를 기른다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는데, 그것 또한 프랑스인의 개성에 어울리는 일이 아니다. 송어 양식과 다른 '어떤' 기발한 일을 찾아내야 했다. 드디어 그도 한 가지 착상을 해냈고 두달 동안 혼자 책을 읽으며 연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들은 뒤에 벌통 두개를 오페라좌의 지붕 위에 갖다 놓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만 마리의 벌들이 오페라좌의 지붕에 보금자리를 차렸고 파리 시내 곳곳의 공원과 아파트 발코니에 있는 이꽃 저꽃들에서 꿀을 날라오기 시작했다. 장 피에르는 갑자기 양봉사업을 부업으로 갖게 된 셈이다. 마르탱과 마찬가지로 파리 시내 한복판, 오페라좌에서였는데 다른 점은 사업 현장이 지하가 아니라 지붕이라는 점이었다.
드디어 꿀이 산출되었다. 공기 오염이 심한 도심지에서 좋은 꿀이 나올리가 없으리라는 애초의 예상을 뒤엎고 품질과 맛이 아주 뛰어나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 꿀은 '파리의 꿀'이라는 상표로 파리에서 제일 비싼 식품가게인 포숑에 넘겨졌다. 의외의 수확을 얻은 장 피에르는 신이 났고 오페라좌에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코메디 프랑세즈 극장의 지붕 위에도 벌통을 갖다 놓았다.
파리의 오페라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희한한 일들은 서울의 오페라가 아무리 돈을 많이 들여도 연출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서울에는 지하수도 없고 송어도 없고 벌떼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마르탱이나 장 피에르 같은 연출자가 없다. 혹 마르탱 같은 사람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장 피에르는 영영 찾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가 '송어 양식으로 재미본다'는 소문이 퍼지면 누구나가 송어 양식에 덤벼들 테니까.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글을 읽다가 문득 아직도 양식과 양봉을 하고 있을라나??? 궁금해졌다...
송어 양식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Pariser Honig 라고 검색을 해봤더니...우와...프랑스인들 양봉은 확실히 한발 더 나갔다...
누군가가 '지붕 위 양봉으로 재미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지붕 위 양봉도 좀 더 보급된 모양이고...
누군가가 '재미본다' 싶으면 우리나라에서 좀 심하게 붐이 일기는 하지만...꼭...우리나라만의 일이라고...자학할 일도 아니다...
루이비똥에서도 파리 매장 옥상에 (위 사진 속...고작) 3개의 벌통을 설치해놨다가 걷어서 고급꿀로 팔며...
한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하면 아주 좋은 날씨를 가진 복받은 사람들이다. 유럽인들이 "봉쥬르(좋은 날)!", "본 조르노", "구텐 모르겐" 등으로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유럽의 일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보릿고개와 같은 굶주린 경험을 가진 우리가 때마다 "아침(점심, 저녁) 드셨습니까?"라고 인사를 나누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유럽의 기후가 나쁜 것은 멕시코 난류의 습기를 먹은 편서풍 영향을 받아서 으레 잿빛 하늘을 보아야 한다. 유럽인들이 부활절을 기다리는 것은 부활절 그 자체보다 부활절 때부터 일기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경부터 9월까지 4~5개월만 괜찮고 10월경부터는 잔뜩 찌푸린 날씨가 이듬해 4월까지 연일 계속된다.
여름엔 기온이 간혹 30도를 넘기도 하지만 건조하기 때문에 불쾌지수가 높지 않아 흔쾌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영하 5도 밑으로 내려가는 일이 드물어도 항상 습하기 때문에 뼈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느끼게 된다. 나같은 사람이 우리 나라 겨울의 양지가 마냥 그리워지는 때가 바로 이런 때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0. 창밖을 보고 아침 댓바람부터 하늘에다 대고...욕을 할뻔 했다...울컥...
미친거야???
+1. 하루 종일 내리는 눈을 한동안 그윽히 바라보던 안야가 말했다...
"아...크리스마스 장이 다 내리고 없는게 너무 안타깝다...나...나가서 글뤼바인 마시고 싶은데..."
학부형들은 차례를 기다려 각 과목 담당교사와 마주 앉아 자기 아이의 성적과 학습태도 등에 관하여 얘기를 주고 받았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말을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미술 교사와 마주 앉아서는 평소에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젊은 여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미술시간에 학생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키지 않느냐구요? 그건 아주 쉬운 얘기입니다. 유치원생에게, 그리고 초등학생과 중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닙니다. 아동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눈과 미적 상상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어릴수록 그렇습니다. 석고 데생은 나중에 미술학교에 가서 하면 되고, 실제로 미술학교에선 많이 실시하고 있습니다. 아동들에게 석고 데생을 시켜선 안되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의 모델을 주입시켜선 안된다는 것입니다. 석고상은 하나의 모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뿐인 지리가 아닙니다. 석고상을 보고 데생을 하라고 하면 가치관을 획일화시키는 위험이 있고 따라서 창조적 개성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대상을 놓고 그리게 하면 아동들끼리 그린 것을 서로 비교합니다. 아동들끼리 우열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때 받았던 신선한 충격은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다. 특히 "서른명의 학생이 하나의 죽은 정물을 바라보는 모습은 전혀 아름답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던 그녀의 미소지은 모습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그녀는 교육학자도 아니었고 교육부장관도 아니었고 일개 중학교의 미술교사였지만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두 아이는 데생 시간이 있는 유치원부터 중학교까지 석고 데생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사생대회 같은 것도 없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 그린 그림 중에는 '나의 집', '나의 식구', '나의 꿈' 등이 있었다. '나'가 앞서 있었다. 따라서 아동마다 서로 다른 그림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린 것을 아이들끼리 비교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미술공책의 왼쪽 면에 시를 받아쓰게 했고 오른쪽 면에 그 시에 대한 느낌을 그리게 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바다는 너의 거울...'로 시작되는 보들레르의 '바다'라는 시를 읽혔고 그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게 했다. 이처럼 프랑스의 미술교육은 '똑같이 그리기'도 아니고 '잘 그리기'도 아니었다. '창조적 개성'과 '아름다움을 보는 눈'을 키워주는 것이었다.
* 홍세화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 중에서
구독하는 팟캐스트 덕분에 간만에 홍세화라는 사람의 존재를 기억하고...생각난 김에 책장 한켠에서 먼지를 한웅큼 모아가고 있던 그의 책을 집어들었다...
주로 프랑스 생활에 바탕한 글들이라...어떤 글들은 공감하고...
독일과 프랑스를 비교하는 또 어떤 글들은 읽으며...'뭘 모르시는 소리...'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처음 읽었던 5년 전과 비교하니...그 사이에 또 감흥이 조금 달라진 구석도 있다...
아무튼...5년전에 이미 포스트 잇을 끼워 두었던 이 구절은...
처음 읽었을 때도...지금도...2002년 여행 때...렌바흐하우스에서의 신선한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돌아보면 2002년 여행에서 거의 절반의 시간은 각 국, 각 도시의 유명 미술관, 박물관 들에서 보낸 셈인데...
뮌헨의 빌라를 개조한 비교적 작은 미술관, 렌바흐 하우스는 규모도 작고 사실 크게 유명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행 당시 돌아본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미술관 중 하나였다...
이 작은 미술관의 주요 콜렉션은 칸딘스키와 청기사파의 작품들이었는데...
나름 미술에 관심이 있다 했어도...정작 작품은 빠진 중고교 한국 미술교육 덕분에...
그때까지도 칸딘스키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뜨거운 추상' 이 한마디 밖에 없었다...
쌍으로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이라고 배웠던 것 같다...
(뭐 따지고 보면, 지금도 아는 것은 그때와 별반 차이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어려운 주제의 전시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방대하지 않은 콜렉션과 한정된 주제 덕분이었다...
칸딘스키의 'Improvisation'씨리즈와 같은 작품들은 어느 도시를 가던지 꼭 한점 씩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그의 초기작을 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은 보고도 그의 작품임을 알아차리지 못했거나...생각해보니 후자일 공산이 좀 높다..ㅠㅠ)
이곳에서 비교적 자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담은 초기 풍경화를 볼 수 있었고...
그 이후 본격적인 추상 시기까지 점진적인 변화 과정을 훑으며...아...이 사람의 작품세계가 이렇게 변해갔었던 거구나...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감상을 도와준 건 마침 미술관 견학을 온 초등학교 1~2학년 쯤 된 아이들 그룹의 수업이었다...
열명 남짓 되는 아이들이 선생님과 미술관 안내인과 함께 칸딘스키의 초기작 풍경화 앞에 둘러 앉아서는...
그림 속에 무엇이 보이는지...그것은 또 어떤 색인지...왜 그렇게 표현되었을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흠...재밌는데...그래도...풍경화에 보이는 걸 이야기하는 건 쉽다고 생각하며...
이 그룹의 수업을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방을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하면...레벨업이다...
조금씩 더 추상적으로 변해가는 그림들 앞에서...
아이들은 여전히 같은 테마로... 자유롭게 자신들이 보는 것들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이 미술 수업의 여운은 칸딘스키의 그림보다 더 뚜렷한 기억으로 오래 남았다...
* 그리고 비교체험...
지금도 그러려나???
그 즈음에는 한국서 미술관을 가면...제법 규모가 있고 유명한 전시는 항상 숙제를 하러온 초등학생 아이들 때문에 북새통이었다...
목에는 볼펜을 걸고, 한손에는 수첩을 든 아이가 그림 앞을 무심히 지나치노라면...
엄마가 뒤에서 불러 세워...작품 옆에 적힌 무언가를 베껴 적으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불러주기도 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우리 세대처럼 미술관 한번 못가보고 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고 하는 것도 문제지만...
저렇게 보는 건, 또 무슨 의미가 있냐고...되려 민폐라고 '저런 숙제는 학교에서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친구와 투덜대기도 했다...
2008년 11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경제학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런던 경제대학을 방문했다. 당시 전세계를 삼켜버린 금융위기에 관해 루이스 가리카노 교수가 발표를 하고 난 후 여왕이 물었다. "왜 아무도 이런 일을 예상을 못했지요?"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터진 이후 모든 사람이 묻고 싶은 말을 여왕폐하께서 하신 것이다.
...(중략)
여왕의 질문에 관한 소식을 들은 영국 아카데미는 2009년 6월 17일 학계, 금융계, 정부 부처 등에서 최고로 꼽히는 경제학자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했다. 이 회의 결과를 정리한 편지는 2009년 7월 22일 여왕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는 런던 경제대학의 저명한 경제학 교수 팀 베슬리와 영국 정부의 역사에 대한 권위자 피터 헤네시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편지에서 베슬리와 헤네시 교수는 "경제학자들 개개인은 유능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맡은 일은 잘 해내고들 있었지만 금융위기 직전에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또 "영국을 비롯해서 세계적으로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집단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시스템 전체에 끼치는 리스크를 이해해야 하는데 그에 실패했다"고 반성했다.
집단적 상상력의 실패?
...(중략) 그것이 집단적이 되었든 다른 종류가 되었든 상상력 같은 개념이 경제학의 주류를 이루는 합리주의적 담론에 낄 자리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영국 경제학계에서 가장 위대하신 학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댄 끝에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고 인정한 셈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편지의 내용은 사태의 심각성을 호도한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자기들의 전문 분야에 한정된 일만 열심히 하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한 세기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재난에 희생된 무고한 기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2008년 위기를 불러올 환경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사실 그들은 1982년 제3세계 채무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 위기,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1998년 러시아 위기 등 1980년대 초 이후 크고 작은 수십개의 금융위기에도 책임이 있다. 금융규제 철폐와 무제한적 단기 이윤추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 것이 바로 그들이다.
더 넓게 생각하면 그들은 경제 성장의 둔화, 고용불안과 불평등 악화ㅡ 그리고 지난 30년간 세계를 괴롭혀온 잦은 금융 위기를 불러온 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주장해왔다. 그에 더해 그들은 개발도상국의 장기발전 전망을 약화시켰다. 부자 나라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기술의 위력을 과대평가하도록 유도했고, 사람들의 생활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상실되는 현상을 모르는 체하도록 했고, 탈산업화 현상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할만한 경제현상들, 즉 점점 심화되는 불평등, 지나치게 높은 경영자들의 보수, 가난한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 등은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과 각자 생산 기여도에 따라 보상받을 필요성을 감안할 때 모두 피할 수 없는 현상일 뿐이라고 주장해왔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중에서
어느 해이던가...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랬다...
가진 것 없는 집 자식이라면, 아들은 무조건 경영 혹은 경제를 공부해야 하고, 딸은 불문학 정도만 전공해서 적당히 우아하하다가 결혼을 잘하는 것이 최선이며...
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무작정 장사라는 것을 하기 때문에 그들이 망할 수 밖에 없다 했다...
경제나 경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경제활동의 결말은 이미 결정되어진 것이라는 것이었다...
우선...독설이다 싶을만큼 냉소적인 친구의 말이 놀라웠고...
세월에 변한 것인지...내가 몰랐던 것인지...처음 보는 친구의 모습에 놀랐고...
경제라고는 관심도 없고, 아는 바도 없었지만..."글쎄...그건 아니지 않나..."
막연히 강하게 거부감이 일었지만...
(다행히 아직까지도 망하지는 않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힘겨워하시는 엄마, 아빠가 그 많은 아줌마, 아저씨 중에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단지 우리가 그 시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여러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 시장론자들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이다. 객관적으로 규정된 자유시장이 존재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주주들이 법적으로는 기업의 주인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기업의 이해 당사자 중에서 가장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장기 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격차는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는 시스템의 차이에서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조직, 더 나은 제도와 물리적 인프라를 가진 경제 환경에서 살기에 그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시장의 정치성과 개인 생산성의 집단적 성격을 이해해야만 더 공평한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 결국엔 시스템의 문제라는 사실을 독일에서 일하며 자주 느낀다...
변화를 인식할 때 우리는 가장 최근의 것을 가장 혁신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과거를 돌아볼 때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기심은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본성 중의 하나이지만, 유일한 본성도 아니고 많은 경우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동기도 아니다.
지난 30년 사이에 물가 변동을 잡았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흥분해서 우리는 같은 기간 동안 전세계 여러 나라가 겪어온 극도로 불안정한 경제 상황을 못본척 했다.
인플레이션에만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우리는 완전 고용이나 경제 성장 같은 중요한 문제에 충분히 신경쓰지 못햇다. '노동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 아래 고용이 불안정해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졌다.
문제는 물가 안정이 경제 안정도를 측정하는 여러 지표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물가 안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제 안정의 지표도 아니다. 사람들의 삶을 흔드는 가장 큰 사건은 일자리를 잃거나, 하는 일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 혹은 금융 위기가 몰아닥쳐 집을 압류당하는 것들이다.
신자유주의 정책 패키지로도 알려진 자유시장 정책 패키지 일련의 정책들은 낮은 인플레이션, 자유로운 자본 이동, 그리고 높은 고용 불안정성 등을 중시한다. 기본적으로 금융 자산 보유자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정책들이 입안된 것이다.
* 결국 잡지도 못했지만, 국민들의 귀를 솔깃하게 하기는 했던 물가정책의 허와 실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한다...
07. 자유시장정책으로 부자가 된 나라는 거의 없다
점점 더 많은 자본이 '초국화'되어 가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초국적 기업들은 국적이 없는 기업이 되기보다는 사실상 해외 지사를 둔 '단일 국적 기업'으로 남아 있다.
...이 말은 초국적 기업이 가진 혜택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기업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이 국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의 국적을 무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도덕적, 역사적 이유들도 중요하지만 초국적 기업들이 자국 편향이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경제적인 것이다. 기업의 핵심 역량을 국경 너머로 옮기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를 해외로 옮기는 것은 쉽다. 그러나 숙련된 노동자나 경여자를 옮기는 데에는 비용이 훨씬 많이 든다. 업무 관행이나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다른 나라로 이전하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렵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높은 수준의 인적, 조직적 역량과 적절한 제도적 여건이 필요한 고도의 기업 활동은 자국에 남게 된다.
기업에 자국 편향성이 있다고 해서 외국인 투자를 제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외국인 투자가 많은 경우 새로운 생산 시설은 설립하는 그린필드 투자가 아니라 기존 기업을 인수하는 브라운필드 투자라는 사실이다.
이 말은 외국인 직접 투자의 많은 부분이 생산이나 고용을 새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기존 기업의 경영권 인수에 집중되었다는 의미이다.
최근 들어 사모펀드들이 기업 인수 부문에서 점점 더 활동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다.
...이 펀드들이 장기적인 기업 발전을 계획하고 회사를 인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구조 조정을 통해 수익성을 높인 다음 3~5년 사이에 되팔 목적으로 기업을 인수하는 것이 관례이다.
...최악의 경우 사모펀드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자산 수탈'을 목적으로 기업을 살 때도 있다.
동종 업계에서 이미 영업하고 있는 기업이 인수를 했다고 해서 모두 피인수 기업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발전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의도는 인수한 회사를 발전시키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축척해 놓은 기술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미 이 때문에 한국의 기업과 자본이 얼마나 피해를 보았으며, 또 보고 있는가...
총생산에서 제조업 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이 줄어든 것은 대부분 제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의 가격이 서비스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지 제조업 생산량의 절대량이 줄어서가 아니다. 이렇게 제조업 생산품의 가격이 낮아진 것은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이 서비스업 분야보다 더 빨리 증가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들이 산업화 단계를 건너뛰고 탈산업화 단계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허상에 불과하다. 서비스 산업은 생산성이 증가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기 힘들다.
* 2008년 금융위기 타격이 영국과 독일, 양국에 미쳤던 영향의 차이만 봐도 제조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평균 소득으로 따져 볼 때, 미국인들은 룩셈부르크를 제외한 다른 선진국 국민들에 비해 재화와 서비스를 살 수 있는 구매력이 가장 높다. 그러나 소득분배가 극도로 불균등한 미국과 상대적으로 소득 분배가 고른 다른 선진국을 이렇게 평균 소득만으로 비교해서는 사람들의 삶을 제대로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 불균등한 소득 분배 현상은 미국의 건강 지표가 좋지 않고 범죄율이 높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국이 다른 선진국보다 같은 돈으로 더 많은 물건과 서비스를 살 수 있는 이유는 이민이 많고 고용 조건이 열악한 덕에 상대적으로 서비스가 싸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은 유럽인들에 비해 일을 훨씬 더 오래 한다. 같은 시간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미국인들보다 유럽인들의 구매력이 더 높아진다. 미국인들처럼 여가 시간보다는 물건을 많이 갖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유럽인들처럼 물건을 더 살 돈 보다는 여가 시간을 확보하는 쪽이 더 나은 삶이냐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의견이 다르겠지만, 적어도 미국이 다른 부자 나라들에 비해 생활 수준이 단연 더 높은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 나라의 평균 소득으로 구매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을 따지는 것 보다 더 넒은 의미에서 생활수준은 측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나면, 소위 말하는 미국의 우월성은 상당히 빛을 잃고 만다.
아프리카의 발목을 잡는다고 하는 구조적 요인들 중 대부분은 오늘날 부자가 된 나라들도 가지고 있던 문제들이다.
나쁜 기후, 내륙 국가, 풍부한 천연자원, 민족 분쟁, 바람직하지 않은 문화 등...
이런 구조적 문제가 아프리카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다만 이런 장애 요인들이 낳는 문제를 처리할 만한 기술적, 제도적, 조직적 기술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기업들이 결국 실패로 끝나는 결정을 가끔 내리는 것처럼 유망주를 선별하는데 성적이 좋은 정부들마저도 항상 옳은 선택만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정부가 유망주를 선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그럴 능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선택의 승률을 높이는 것이다.
고르는 주체가 기업이 되었든 정부가 되었든 유망주는 항상 선별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80년대 이래로 우리는 부자들에게 파이에서 더 큰 조각을 주면 그들이 더 많은 부를 창출해서 장기적으로 파이를 더욱 키울 것이라고 믿었다.
문제는 이른바 투자자의 손에 소득을 몰아주는 것만으로는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돈이 손에 들어와도 그 투자자가 투자를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강력한 복지 시스템을 갖춘 국가들의 경우에는 설사 '부자에게 유리한 재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에 따른 성장의 혜택을 사회 전체로 확산시키는 것이 훨씬 쉽다. 세금과 소득 이전 정책이라는 강력한 기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금 징수와 소득 이전이 시행되기 전의 소득 분배를 보면 벨기에와 독일은 미국보다 더 불평등하고, 스웨덴과 네델란드는 미국과 비슷하다. 다시 말해서 상당한 양의 물이 밑으로 내려오기 위해서는 복지 국가라는 이름의 전기 펌프가 필요한 것이다.
비슷한 규모와 실적을 올리는 다른 나라 회사 경영진들에 비해 미국 경영자들은 절대 기준으로 많게는 20배나 더 받는다. 이들은 또 보수만 지나치게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경영부진에 대해서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 게다가 실제로 미국 경영자들의 보수가 완전히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영자 계층이 지닌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힘은 자신들의 보수를 결정하는 시장 자체를 조종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2007년 달러화 가치를 기준으로 한 미국 노동자의 시간당 평균 임금은 1973년 18.90달러에서 2006년 21.34달러로 상승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보수는 1970년대 이후 실질적으로 거의 오르지 않았다.
...개별 보수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가구당 수입은 높아졌다. 개별 보수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지만 가구당 수입은 높아졌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더 많은 가정이 맞벌이에 나섰기 때문이다.
...2008년처럼 일이 잘못되는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기업을 회생시키는 데 납세자들의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지만 경영진은 그야말로 거의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사고 현장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
가난한 나라가 가난한 이유는 개인들에게 기업가 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산을 할 수 있는 기술과 현대식 기업같은 발달된 사회조직이 없어서이다.
개인의 창업을 돕는다는 목표를 내걸고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액의 돈을 빌려 주는 마이크로크레디트(미소금융) 제도가 의도한 만큼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는 것이 점점 분명해지는 것만 봐도 개인의 기업가 정신이 갖는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이크로크레디트 자금의 대부분은 원래 목표였던 가난한 사람들이 기업가 정신을 발휘하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 사용된 셈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자영업 지원에서 사용되었던 아주 일부의 자금마저도 가난한 사람들이 빈곤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데 실패했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동기 부여가 확실하고, 사업에 필요한 기술도 있고, 시장의 압력도 충분한 데다 사업에 온 정력을 기울이는데도 결과가 이렇게 미미한 것은 도대체 왜일까?
...이 문제는 이른바 '구성의 오류'로 빚어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특정 사업으로 성공했다 해서 같은 사업을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말이다.
...가진 기술은 한정되어 있고, 사용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도 제한되어 있는 마당에 마이크로파이낸스를 통해 확보할 수 있는 자금마저 얼마 되지 않으니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이 시작할 수 있는 사업의 종류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늘 최선의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직접 관련된 일들조차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전문 용어로는 '제한적 합리성'이라고 한다. 세상은 너무나도 복잡하고, 그런 세상에 대처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처리해야 하는 문제의 복잡성을 줄이려면 일부러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고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고 있다.
특히 극도로 복잡한 현대 금융 시장과 같은 분야에서 정부의 규제가 효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정부가 보유한 지식이나 정보가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정부 규제를 통해 선택의 범위를 제한하여 문제의 복잡성을 줄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아 잘못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 다른 것도 아닌 자산 가격 결정에 대한 연구로 상을 받은 사람들마저 금융 시장을 읽어내지 못하는 마당에 어떻게 '사람은 늘 자기에게 가장 이로운 최선의 선택을 하는 만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된다'고 가정하는 경제 원리에 입각하여 세상을 운영할 수 있단 말인가?
교육울 통해 얻은 지식은 사람들이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생산성 향상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한 나라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교육 수준이 아니라 생산성 높은 산업 활동에 개인들을 조직적으로 참여시킬 수 있는 사회 전체의 능력이다...
교육은 소중하다. 그러나 교육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성을 높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력을 발휘하고 더 만족스럽고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 결국에는 시스템의 문제다...
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자본주의 정부는 연구개발과 인프라 투자에 필요한 재원의 상당 부분을 지훤하고 있고, 또 대부분의 자본주의 정부가 국영 기업의 사업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경제의 상당 부분을 계획한다. 부문별 산업 정책을 통해 미래의 산업 구조를 계획하는 경우도 많으며, 심지어 유도 계획을 통해 국민 경제의 미래 모습까지 설계하기도 한다.
...문제는 계획의 수립여부가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적절한 계획을 하는 지에 달려 있다.
기회의 균등은 공평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경쟁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기회의 균등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일정 수준 인상의 결과의 균등이 보장되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공정한 기회 비슷한 것이라도 확보해 주려면 부모 소득을 최소한 어느 정도는 균등하게 맞춰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 한 무상교육, 무상급식, 무상예방접종 등을 아무리 제공해 봤자 아이들에게 실질적으로 기회의 균등을 제공할 수 없다.
복지정책이 잘 된 나라일수록 계층 이동이 더 활발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준다는 의미에서 복지 정책은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법이 기업가들로 하여금 위험을 더 적극적으로 감수하게 해주는 것처럼, 복지 정책은 노동자들이 변화에 더 개방적이고, 그에 따른 위험을 더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를 갖게 해준다.
다른 모든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복지제도도 장저과 단점이 있다. 특히 이 제도가 보편적이지 않고 미국처럼 선별적으로 적용될 경우 수혜자에게 낙인을 찍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복지 제도는 사람들이 가진 '최저 희망 임금' 수준을 높여서 열악한 조건에서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일자리를 택하는 것을 꺼리게 만든다. 이런 현상이 꼭 바람직하지 않은 것인지는 각자 견해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일을 하는 데도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의 수많은
근로 빈곤층 문제나 유럽이 안고 있는 전반적으로 높은 실업률이나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잠재적 단점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잘 설계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를 줘서 산업 구조 조정이 쉬워지기 때문에 경제 발전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미국에서는 금융 산업이 얼마나 매력적인 종목이었던지 심지어 상당수의 제조업 대기업들조차 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금융기업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금융 산업 참여율이 높았다.
...예를 들어 GE, GM, 포드 같이 한때 미국 제조업의 상징이던 회사들조차 자회사로 설립한 금융 기업은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반면, 핵심 비즈니스인 제조업 부문은 수그러들면서 '금융화'되어 버렸다.
금융 발전이 자본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금융 자본이 경제 발전에 필수적이었던 이유는 산업자본보다 훨씬 유동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금융 자본은 생산을 저해하거나 심지어 파괴적일 수도 있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경제가 불안해진다. 우리가 최근에 목격한 바대로 유동성 높은 금융 자본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것도 대단히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국적과 산업 부문을 가리지 않고 옮겨 다니기 때문이다.
더 중유한 것은 장기적인 부작용이다. 금융의 높은 유동성은 생산성 상승을 약화시킨다.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려면 장기적이고 안정적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금을 제공하는 금융 자본은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장기투자계획을 세우가 실행하기가 어려워진다. 최근 수십년 동안 금융심화도가 엄청나게 높아졌는데도 경제성장이 실질적으로 지체되고 있는 것은 이런 점들 때문이다.
경제학은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 장하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2013년의 첫 책...첫 선물...
부분적으로 너무 경제학적인 시각이지 않은가 싶은 부분도 있었지만...대체로 동의...
조금 뒤늦게 읽긴 했지만...좋은 책을 써주신 작가와 좋은 책을 선물해준 동생에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