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결정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단 웃기지 않는게 문제다. 아사다 마오와 캐롤리나 코스트너는 그들 경력 중 최고의 연기를 펼쳤고, 각각 그에 합당하게 142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렇지만 갑자기 소트니코바는 클린하게 연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설명불가한 149점을 받았다. 이제껏 그녀의 최고점은 126점이었다! 그리고 김연아는 완벽하게 실수없이 대단한 연기를 했다. 2010년 그녀는 비슷한 성과를 내고 150점을 받았었다. 전체적으로 점수가 후해진 소치에서는 155점이나 그 이상이라야 합당했다. 대신 그녀의 점수는 불과 144점에 불과하다. 그야말로 스캔들이다. 게다가 놀라운 것은, 심판들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김연아의 점수를 훨씬 더 빨리 내린 것이다. 김연아가 채 자리를 잡고 앉기도 전에, 점수가 나왔다. 한때 극복했다고 믿고있던, 예전 채점시스템의 암울한 시기가 다시 도래했다. 피겨스케이팅사의 슬픈 날이다.
3. 뼈아픈...
나도 동감이다. 내가 피겨전문가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실수도 없고, 게다가 그렇게 인상적인 연기가 펼쳐진 뒤에, 비전문가(인 나)도 러시아 선수가 실수도 하고 허둥지둥한 버둥댐으로 어떻게 이렇듯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타리나 비트가 스튜디오에서 이유없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TV 엠씨들도 그녀가 한 것처럼, 입장을 명확히 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슈피겔 온라인이라도...
4. 선택의...
김연아는 트리플 루프를 보여주지 않았다(?), 안그랬으면 그녀가 우승했을텐데. 내 생각에 아사다 마오가 최고였다. 그 다음이 김연아, 그리고 캐롤리나 코스트너.
5. 뻔한 거였다.
나는 이 금메달에 몽땅 베팅했었다. 뭐 내가 어렸을 적부터 피겨스케이팅은 항상 밀어주기 아니면 사기였으니까. 러시아에서 러시아 선수가 우승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심판들은 오늘밤 처형대에 세워져 총살을 면치못했을테니까. 스캔들 판정이 난 후, 카타리나 비트는 전혀 진정을 하지 못했고, ARD는 그녀의 크리틱을 서둘러 잘라버렸다. 사람들은 당장 다른 매체에서 크리틱을 찾는다.
6. 이전 슈피겔 기사에
금메달을 미국과 러시아가 나눠먹기로 했다고 보도했던 프랑스 잡지에선 새로운 기사가 없나?
7. 떠밀어진 금메달
이것은 명백히 심판들의 담합이었다. 러시아 선수는 위에서 찾을 게 전혀 없었다. 김연아와 코스트너가 그냥 훨씬 나았다. 모든 다른 선수들은 사소한 실수에 감점을 당했지만, 연기 도중 관중을 향해 윙크를 하고 실수도 보였던 소트니코바는 예외였다. 실수없이 훌륭하게 스케이트를 탄 김연아와 정반대로 말이다. 러시아 아이스하키팀이 일찍 탈락하면서, 러시아는 (대체) 영웅이 필요했고, 심판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냈다.
8.
나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이탈리아 선수와 러시아 선수간의 차이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러시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은 정말, 정말 큰 의문이다. 그녀의 프리는 연기, 표현도 한국선수에 비해 아름답지 않았다.
카타리나 비트가 열을 내는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다른 경기 중계로 넘어갔어도...
독일에서는 생방송에 갑자기 방송이 끊어지는 경우가 흔한 일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었는데...
독일 네티즌들 중에는 이에 대해서, 당황한 방송사의 의도적 편집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듣고 보니 그랬구나 싶기도 하다...
한국이든...러시아든...부끄러운 짓에 정작 당사자가 부끄러운 줄을 모르면 답이 없다...
Wie viel kann schiefgehen bei einem großen Bauprojekt? Jede Menge, wie der In-Tempo-Doppelturm im spanischen Benidorm zeigt: Mit seinen
47 Stockwerken gerät der Luxustraum zur Lachnummer - die Architekten vergaßen den Einbau eines funktionierenden Aufzugs.
Er sollte der Stolz von Benidorm werden - und mit 47 Stockwerken und 188 Metern Höhe das höchste Wohngebäude der Europäischen Union: Als das Modell des
"Residencial In Tempo" nach drei Jahren Vorplanung im Januar 2006 vorgestellt wurde, dachte in Spanien noch niemand an eine Wirtschaftskrise. Die aber schlug
zu, kurz nachdem der Bau begann. Es ging nicht recht vorwärts und offenbar auch drunter und drüber, wie jetzt bekannt wurde: So vergaß der Architekt unter
anderem, für den Wolkenkratzer einen ausreichenden Aufzugschacht einzuplanen.
Verursacht wurde die nun bekannt gewordene peinliche Panne letztlich durch eine Mischung aus Gier und Inkompetenz. Ursprünglich war der "In Tempo" nur mit
20 Etagen geplant worden. Als der Auftraggeber nach mehr Mietern und Käufern verlangte, setzte der Architekt einfach 27 weitere oben drauf - nur eben, ohne an
einen passenden Fahrstuhlschacht und die dafür notwendige Hebetechnik zu denken. Das fiel nun angeblich erst rund 110 Baumeter später im Januar 2012 auf,
wurde aber bisher nicht öffentlich gemacht - es fällt schwer, das zu glauben.
Die bis zum 20. Stockwerk verbaute Aufzugtechnik war genau für diese Höhe ausgelegt. Als die Entscheidung zur Aufstockung kam, zog man den vorhandenen
Schacht zwar weiter, bedachte aber weder, dass mehr Stockwerke auch mehr Nutzung bedeuten würden, noch, dass das Raumangebot nicht für die durch die
zusätzliche Höhe notwendige Hebetechnik reichen würde. Die Spanier verbuchen das Bau-Desaster als nationale Schmach, als Fanal der Inkompetenz - wenn man
so will, ist es ihr BERlin.
Pannenserie produziere Mängel in Masse
Mit Ruhm bekleckert hatten sich die Bauherren aber auch vorher nicht. Immer wieder kam es zu geldlichen Engpässen, Streiks wegen teils über Monate nicht
gezahlter Löhne verzögerten den Bau.
Der begann schon langsam, weil mit nahezu altägyptischen Methoden gebaut wurde: Ein Lastenaufzug wurde erst installiert, nachdem die ersten 23 Stockwerke
hochgezogen waren - bis dahin war alles Kran- und Laufarbeit. Als der Lastenaufzug den Betrieb schließlich aufnahm, kollabierte er und verletzte 13 Arbeiter.
"In Tempo" produzierte eine unendliche Kette von Pannen und - wie ein nun durch die Zeitung "El País" öffentlich gemachter Bericht zeigte - auch von Mängeln.
Einen Schuldigen dafür zu finden, gestaltet sich schwierig. Finanziert wurde der Bau ursprünglich von der Bank Caixa Galicia, die 2009 in finanzielle
Schwierigkeiten geriet, 2010 zunächst mit Caixanova fusionierte und 2011 schließlich als NCG Banco verstaatlicht werden musste. Sie hat mit dem Bau heute
nichts mehr zu tun.
Ob und wie schnell der größte Mangel des fehlenden Aufzugschachtes, der die weitere Vermarktung wohl nicht unerheblich behindern dürfte, gelöst werden kann,
steht in den Sternen. Die naheliegende Möglichkeit dürfte ein Außenaufzug sein, was allerdings einen nicht unerheblichen Eingriff in das architektonische Konzept
des Luxusbaus wäre.
Inzwischen hat der verantwortliche Architekt die Segel gestrichen, und das Gebäude wurde von der Sociedad de Gestión de Activos de la Reestructuración
Bancaria übernommen. Die ist besser bekannt unter dem kurzen und knackigen Namen Sareb - es ist Spaniens "Bad Bank".
Offiziell heißt es weiterhin, das Gebäude solle nun bis Dezember dieses Jahres fertiggestellt werden, der Verkauf von Wohnungen gehe weiter. Allerdings, berichtet
die englische Zeitung "Daily Mail", wohl mit deutlichen Preisabschlägen. Klar, wenn man laufen muss.
대형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주 많이, 스페인 베니돔에 템포 더블타워의 사례처럼. 47층이라는 숫자와 함께 호화빌딩에 대한 꿈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 건축가가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건물은 베니돔의 자랑이 될뻔했었다. 47층, 188미터 높이로 EU내 주거건물로는 최고를 기록하며: 2006년 1월 3년에 걸친 초기 설계 끝에 "템포의 주거"가 모델로 발표되었을때, 당시 스페인의 그 누구도 불경기를 예견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불경기는 공사 시작 직후에 닥쳤다.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실상 위로도 그리고 아래로도. 현재 알려진 바와 같이: 건축가가 수많은 다른 것들 외에, 고층 빌딩에 적합한 충분한 수의 엘리베이터 샤프트를 계획하는 것을 잊었다.
알려진 바로는 탐욕과 무능의 혼재가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 건물은 20층으로 계획되었다. 건축주가 세입자와 구매자 수를 끌어올리기를 요구하면서, 건축가는 그대로 그 위에다 27층을 더 얹어버렸다. 적합한 엘리베이터 샤프트 크기와, 엘리베이터를 끌어올리기 위한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2012년 1월경, 거의 110미터 높이에서 이 문제를 깨달았고, 이제껏 함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20층까지 지어진 엘리베이터 테크닉은 정확히 이 높이를 커버하는 것이었다. 층을 더 얹기로 결정했을 때, 기존의 샤프트를 그대로 연장했는데, 더 많은 층수가 더 많은 수요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샤프트 규모가 추가된 높이를 지원하는 테크닉 시설이 들어가기에 충분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스페인인들은 이 재앙과 같은 공사를 국가적 치욕, 무능의 상징으로 판정했다. - 이를테면, 이것은 그들의 베를린이다(?).
문제의 연속이 규모에 부족을 야기했다.
Mit Ruhm bekleckert hatten sich die Bauherren aber auch vorher nicht.. 공사비 부족이 반복되고, 수 달간 체불된 임금 때문에 파업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지체되었다.
문제는 이미 천천히 시작되었었다. 거의 고대 이집트 식에 맞먹는 방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23층까지 올려진 다음에, 수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먼저 설치되었다. 23층까지는 크레인을 이용하거나 계단을 통해 작업했다. 수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작동하자, 이 엘리베이터는 추락했고, 이 사고로 13명의 인부가 다쳤다.
이 건물은 끝없는 문제의 사슬을 풀어냈다 -신문 "El País"의 기사처럼. 대한 책임자를 따지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이 건물은 원래 카이사 갈리시아 은행이 자본을 댔는데, 이 은행은 2009년 재정위기를 맞았고, 2010년에 일단 카이사노바와 함께 병합되었고, 2011년 최종적으로 NCG 은행으로 국영화 되었다. 이 은행은 오늘날 더 이상 이 공사와 관계가 없다.
앞으로의 분양에 가장 큰 관건이 될, 부족한 엘리베이터 샤프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은 방안은 외부의 엘리베이터일 것이지만, 이는 호화로움을 지향했던 원래 설계 컨셉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 사이 책임 건축가는 사임을 했고, 이 건물은 Sociedad de Gestión de Activos de la Reestructuración Bancaria가 인수했다. 이 회사는 속칭 약자 Sareb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스페인의 '나쁜 은행'이다.
이 건물의 완공 시기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올해 12월로 알려져있고, 집들도 판매중이다. 그렇지만 영어권 신문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가격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뭐, 걸어가야면야...
Wenn aus einem Dorf eine Stadt wird: Zehntausende feiern an diesem Wochenende wieder in Wacken das weltgrößte Metal-Festival. Dann sind die Äcker übersät
mit Zeltplätzen und Bühnen - aber auch im Winter zieht es Besucher dorthin.
Ein beherzter Griff an den Gürtel, das linke Bein auf den Stein und schnell noch die Heavy-Metal-Zottel über die Schultern fegen - dann ist Thomas Jensen bereit für
das Portraitfoto. "Dauert das noch lange? Mir ist arschkalt!" sagt er schon nach dem dritten Klicken der Kamera. Die Schneeflocken wehen ihm ins Gesicht und
werden auf der Haut sofort zu kleinen Wassertropfen.
Der Mitbegründer des Wacken Open Airs steht mitten auf einem zugeschneiten Acker in Schleswig-Holstein. Am Horizont ein paar karge Büsche und Nebel-
schwaden, es ist mucksmäuschenstill. Nur die Gullydeckel und Starkstromkästen deuten auf das Spektakel im Sommer hin. "Dann machen wir aus dem Dorf eine
Stadt", sagt Jensen und knöpft sich jetzt doch lieber seinen Mantel zu.
Rund ein halbes Jahr später, wenn Jensens Stadt erbaut ist, sind die Äcker übersät mit Zeltplätzen, Wagenburgen und Bühnen; mit Straßen, Laternen und
Imbissbuden. Inklusive der Helfer strömen an diesem Wochenende fast 85.000 Menschen nach Wacken, um zu den Gitarren-Riffs von Rammstein, Alice Cooper
oder Deep Purple zu rocken. Dafür arbeiten Jensen und sein Team das ganze Jahr.
"Das Open Air ist mehr als nur ein Wochenende, wir sind mit dem Dorf tief verwurzelt", sagt der Gründer. Auch im Winter kommen Besucher nach Wacken, um
nach Zeugen aus fast 25 Jahren Metal-Geschichte zu suchen. Die Zeichen sind schnell gefunden: Der alte Kornspeicher mit dem Wacken-Schädel ist schon aus
der Ferne zu sehen, in den Supermarkt-Regalen von Familie Boll steht "Wacken-Vodka", und im Dönerimbiss hängen Fotos von langen Warteschlangen hungriger
작은 마을이 도시가 된다면: 수만명이 이번주 주말 또 다시 바켄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메탈 페스티벌을 즐길 것이다. 농지는 텐트와 무대들로 꽉차게 된다. 그렇지만 이곳은 겨울에도 방문객을 이끈다.
호기있게 벨트에 손을 얹고, 왼쪽 다리는 바위 위에, 얼른 머리를 헤비메탈 스타일로 헝클어트려 어깨 위로 늘어뜨린다 - 그러면 토마스 옌센은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된 것이다. 카메라 셔터를 세번째 누르고 나자, 그는 "아직 멀었어요? 더럽게 춥군요!"라고 외쳤다. 눈송이가 그의 얼굴가를 맴돌더니, 피부에 닿기가 무섭게 작은 물방울로 변해 버렸다.
'바켄 오픈에어'의 공동 창시자는 슐레스빅-홀슈타인의 눈내린 경지 한 가운데에 서있다. 지평선에는 황폐한 덤불과 안개만이 깔려 있고, 사방이 고요하다. 맨홀뚜껑과 고압전원 상자들만이 여름의 스펙터클함을 알린다. "그러면 우리는 작은 마을을 도시로 만들죠" 라고 옌센은 말하며 외투를 여몄다.
거의 반년 후에, 옌센의 도시가 건설되면, 농지는 텐트들과, 차들, 그리고 무대로 가득차게 된다: 거리들, 조명들, 그리고 먹자골목들. 행사요원들을 포함해서 대략 85.000여명의 인원이 이번 주말 바켄을 찾을 것이다. 람슈타인, 앨리스 쿠퍼 혹은 딥퍼플의 기타 리프에 맞춰 록을 즐기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 옌센과 그의 팀은 1년을 준비한다.
"야회행사는 어느 한 주말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에 깊이 뿌리내렸습니다" 라고 행사개척자가 말한다. 겨울에도 이제 거의 25년이 다되어가는 메탈의 역사를 목격하기 위해서 바켄을 찾기도 한다. 흔적들은 쉽게 발견이 된다: 오래된 곡식 창고에 그려진 바켄-해골은 멀리서도 눈에 띈다. 볼 가족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의 진열대 위에는 바켄-보드카가 놓여있다. 케밥집에는 굶주린 메탈인들이 길게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진이 걸려있다.
출처: 슈피겔
* 출근 준비를 하는데, TV 모닝매거진에서 바켄의 오픈에어 메탈 페스티벌에 대한 보도를 한다...
독일에도 우드스탁과 같은 락페스티벌이 있다는 이야기를 진작부터 듣고 있었는데...
아하...이거구나 한다...
가스펠하는 독일인...재즈하는 독일인만큼...락이라는 이름으로 오버를 하는 독일인도 어색하다...
어째...'참...애쓴다...'는 애잔한 느낌이...
클래식에서만큼은 독보적인 독일인들인데...
클래식을 제외한 다른 장르를 하면... 장르를 불문하고...무엇을 해도 어설프다...쩝...
정식행사는 오늘부터이기는 하지만...
전날의 풍경은 폭스페스트와 슐라거(한국으로 치면 트로트)에 락이 참...어정쩡하게 섞여 있는 느낌이다...
Die deutschen Star-Architekten Meinhard von Gerkan und Christoph Ingenhoven über die moralische Verantwortung von Architekten, die im Ausland arbeiten, über
die Aufgaben ihrer Zunft in einer globalisierten Welt und die politische Relevanz von Gebäuden
SPIEGEL : Herr von Gerkan, Sie bauen in nichtdemokratischen Ländern wie Vietnam und China. China ist zuletzt durch die Zerschlagung des Aufstands in Tibet
international in die Kritik geraten. Sehen Sie durch die jüngsten Entwicklungen Ihre Auslandsprojekte in einem anderen Licht?
Gerkan : Ich habe meine Meinung nicht geändert. Durch das, was jetzt passiert ist, kam ja nur etwas an die Oberfläche, was ohnehin schon seit nahezu 50
Jahren virulent ist. Natürlich war ich mir von Anfang an darüber bewusst, wo ich da baue, ich bin mir der Nachteile bewusst - aber auch der Vorteile. Ich baue in China vor allem aus baukulturellen Gründen, denn es ist ja unbestritten, dass das Land mit Abstand den größten Freiraum für avantgardistische Architektur bietet.
Ingenhoven: Das ist ein Punkt, auf den ich gerne antworte. Man kann doch nicht sagen: Weil man sich in Ländern wie China nicht so wie in Deutschland mit
Bezirksvertretungen oder Senatsbaudirektoren herumschlagen muss, repräsentiert das, was dann dabei herauskommt, gleich die bessere Qualität und die größere Freiheit.
Gerkan : Aber Herr Ingenhoven, wenn wir nun ausgerechnet nicht für China und nicht für Vietnam bauen dürften, dann dürften wir für die halbe Welt nicht bauen.
Denn so viel blütenweiße Demokratien gibt es gar nicht. Und sollen deutsche Architekten - und zwar nur die, weder die Industrie noch der Handel, noch der Mittelstand, noch Ingenieure -, sollen die sich allen Ernstes die Hälfte der Erdkugel versagen? Ist diese Forderung nicht absurd?
Ingenhoven: Man kann nicht einfach sagen, was die Industrie macht, das machen wir auch. Man kann nicht sagen, die Hälfte der Welt besteht aus nicht ganz
lupenreinen Demokratien, und deswegen bauen wir dann gleich für die ganz Schlimmen. Lassen Sie uns mal wegkommen von China: Es kann doch
nicht wahr sein, dass deutsche Architekten in Libyen die neue Regierungshauptstadt Gaddafis bauen ...
SPIEGEL : ... das Berliner Büro Léon, Wohlhage und Wernik ...
Gerkan : ... bitte lassen Sie mich noch einmal auf mein Engagement in China zurückkommen. Es gibt noch einen weiteren Grund, warum ich dort baue, und
der hat mit unserem Klimaproblem zu tun. Deutschland ist, was ökologisches Bauen anbetrifft, führend in der Welt. In China haben wir die erste
Fassade mit außenliegender Beschattung an einem Hochhaus gebaut. Wir Deutschen sind diejenigen, die so etwas in die Welt hinaustragen können.
Und das nicht nur aus einem Eigeninteresse, und nicht nur im Interesse der Chinesen, sondern aus Verantwortung gegenüber der gesamten
Menschheit.
SPIEGEL : Lassen Sie uns jetzt einmal nicht über China, nicht über Libyen reden, sondern über ein ganz konkretes Beispiel, bei dem Sie beide sogar aufeinander-
gestoßen sind. Herr Ingenhoven, Sie sind eingeladen worden, sich am Wettbewerb für den Bau des vietnamesischen Parlaments zu beteiligen und
haben abgelehnt. Herr von Gerkan hat ihn gewonnen und wird das Parlament bauen. Warum haben Sie abgelehnt?
Ingenhoven: Wir haben in Vietnam in den letzten paar Jahren mindestens drei, vier Wettbewerbe abgelehnt, weil die finanziellen und die Copyright-Bedingungen in
den Auslobungsunterlagen absolut katastrophal waren. Katastrophal! Wenn man für einen Wettbewerb 3000, 4000, 5000 Euro bekommt und dann
200 000 Quadratmeter abliefern soll, und das alles innerhalb kürzester Zeit, und wenn da mehr oder weniger drinsteht, dass man keine Rechte auf
seinen Entwurf hat, dann hab ich keinen Spaß daran. Ich frage mich: Wieso sind die so drauf? Wenn die ein paar tolle Architekten haben wollen,
warum können die nicht auch ordentlich Geld dafür ausgeben? Warum wollen die kein Copyright respektieren? Ich glaube, dass es auch etwas mit
dem politischen Status dieses Landes zu tun hat, dass man dort mit solchen Dingen nachlässig umgeht.
Gerkan : Es wundert mich, dass Sie, der doch einige Erfahrung im Ausland hat, solche Ausschreibungen so ernst nehmen. Sie müssten doch wissen, dass die
Bürokraten in diesen Ländern Dinge weit ab von der Realität formulieren. Ich will Sie gar nicht nötigen, nach Vietnam zu kommen, wir fühlen uns da
ganz wohl, wir sind fast die Einzigen, die dort die großen Bauten errichten: Das Konferenzzentrum der Regierung etwa - das größte in Asien - ist
schon fertig. Dort treffen sich übrigens Präsidenten von Einparteiensystemen mit den Oberhäuptern demokratischer Regierungen.
SPIEGEL : Wie erleben Sie das Arbeiten dort?
Gerkan : Das Zentrum haben wir unter Bedingungen gebaut, die, was die Technik betrifft, abenteuerlich waren, was das Honorar betrifft, aber auskömmlich. Nun
steht, nach einem Nationalmuseum und dem Innenministerium, das Parlament an. Es hat Widerstand in der Bevölkerung gegeben, Fragen wie: "Wo
bleibt unsere nationale Identität? Wo finden wir uns da wieder?" Daraufhin hat die Regierung das gesamte Wettbewerbsergebnis einer Volksbefragung
unterstellt. Über 50 Prozent der Stimmen waren für unseren Entwurf. Wir bekamen danach den Auftrag. Ich kann Ihnen versichern, sowohl die
finanziellen als auch die zeitlichen als auch die menschlichen Bedingungen lassen nichts zu wünschen übrig. Wir haben selten so zuvorkommende
Menschen auf der Bauherrenseite getroffen, mit denen wir Konflikte lösen, bei denen in Europa Anwälte eingeschaltet werden.
SPIEGEL : Die beiden Haltungen, die Sie beide repräsentieren, gab es auch in der Debatte, die über Olympia aufgekommen ist: nämlich, ob die Spiele boykottiert
werden sollen oder nicht. Die einen meinen, durch Einmischung könne man etwas ändern. Die anderen meinen, sich herauszuhalten sei ein wichtiges
politisches Signal. Herr von Gerkan, haben Sie durch Ihre oder bei Ihrer Arbeit in China gemerkt, dass sich dort etwas verändert?
Gerkan : Ich habe China vor neuneinhalb Jahren zum ersten Mal betreten. Das Projekt, mit dem wir befasst waren, war quasi politisch neutral: eine deutsche
Schule. Ich war seitdem mehr als 50-mal in China, habe Hunderte von Menschen kennengelernt und viele Freundschaften geschlossen. Meine
Wahrnehmung weicht so eklatant von dem ab, was hier in den Medien verbreitet wird, dass es zum Himmel schreit. Unsere chinesischen Mitarbeiter
haben zu Recht Wut im Bauch über die westliche Berichterstattung. Meiner Meinung nach gibt es in China heute den höchsten Grad der freien
Entfaltung für jedes Individuum seit Menschengedenken, trotz aller noch verbliebenen unschönen Dinge.
Ingenhoven: Ja, aber wir müssen jetzt aufpassen. Ich wollte mich nicht hergeben zu einer Anti-China-Debatte, und Sie müssen auch keine Pro-China-Debatte
führen. Es geht doch nicht darum, ob man in China einen Wohnblock bauen kann. Es geht doch darum, ob man für nichtdemokratische Staaten
Repräsentationsbauten errichtet. Ich muss nicht unbedingt das Parlament eines diktatorisch regierten Landes wie Vietnam bauen, und ich muss auch
nicht unbedingt am Platz des Himmlischen Friedens das chinesische Nationalmuseum bauen, wie Sie das tun, Herr von Gerkan. Ich glaube, dass man
sich bei gewissen Projekten entscheiden muss. Ich weiß, dass Vietnam viel Sympathie genießt, viele Menschen machen da tolle Urlaube. Trotzdem
ist es ein Einparteien-Regime, es gibt keine freie Presse, es gibt nur eingeschränkte Religionsfreiheit - das sind keine Kleinigkeiten!
SPIEGEL : Herr Ingenhoven, wo ziehen Sie selbst die Grenze? Sie bauen ja in Singapur - auch kein ganz zweifelsfreier Staat.
Ingenhoven: Diese Grenze ist schwer zu ziehen, das gebe ich zu, und Singapur ist, das habe ich immer freimütig bekannt, ein Grenzfall - wenngleich ein erheblich
liberalerer Staat als China. Wir bauen dort aber zwei privat finanzierte Bürogebäude und nicht das oberste Gericht des Landes. Ich finde, wir
Architekten sollten versuchen, uns auf Märkte in den demokratischen Ländern mit freier Presse zu konzentrieren, Märkte, die von deutschen
Architekten, freundlich gesagt, vernachlässigt werden.
Gerkan : Tatsache ist, dass über zwei Drittel aller Bauten heute in Ländern errichtet werden, denen Herr Ingenhoven sein Verdikt auferlegt. Welche
Verantwortung übernehmen Sie gegenüber einer globalen Entwicklung, wenn Sie sich entziehen? Letztlich geht es ja nicht um ein Bauen für Systeme, es ist ja ein Bauen für Menschen. Wir bauen in China Kirchen, wir bauen Schulen, eine ganze Stadt.
SPIEGEL : Was glauben Sie mit Ihren Bauten in China an gesellschaftlichen Änderungen bewirken zu können, Herr von Gerkan?
Gerkan : Ich bin der festen Überzeugung, wenn Lingang, unsere neue Stadt für 800 000 Menschen, fertig ist, werden viele Chinesen sehen, was sie selbst bisher
für Fehler gemacht haben: dass man mit dem Verkehr anders umgehen kann, dass man bessere klimatische Bedingungen schaffen kann, dass man
Freizeit, Wohnen und Arbeiten zur Symbiose bringen kann. Kurz, dass man Lebensqualität durch Architektur schaffen kann, jenseits aller Ideologie.
SPIEGEL : Eine Stadt anzulegen ist das eine, einen staatlichen Repräsentationsbau zu entwerfen etwas grundsätzlich anderes. Lässt sich durch die Art, wie man
etwa ein Parlament baut, Politik beeinflussen?
Gerkan : Ich kann jedenfalls so viel sagen, dass man meinen Parlamentsbau in Vietnam in seiner Funktionalität - mit Parlamentssitzen, mit einem Präsidium,
mit Zuschauerrängen, mit Beratungszimmern der einzelnen Ausschüsse - nahezu eins zu eins in irgendein demokratisches Land übersetzen kann.
Meine Ethik misst sich daran, welche Architektur für die Menschen welche Bedingungen schafft. Dass sie missbraucht werden kann, ist etwas
anderes. Man wird uns kaum vorwerfen können, dass wir Architektur bauen, die Macht demonstrierte - wie einst für einen Hitler oder für einen
Ceausescu.
Ingenhoven: Es gibt ja erstaunlich viele Parlamente auf dieser Welt, viel mehr Parlamente jedenfalls als Demokratien. Es gibt sogar einen Volkskongress in China,
und die Fotos davon zeigen: Das ist eine Art Zuhörerveranstaltung vor einem Podium. Ich kenne Ihr vietnamesisches Parlamentsprojekt nicht, Herr von
Gerkan, aber es gibt eine Darstellung von deutschen Kollegen, die dieses Regierungsgebäude in Tripolis bauen, und das sieht aus wie der chinesische
Volkskongress. Man muss das Bild angucken und dann weiß man ganz genau, welch Geistes Kind die Leute sind, die sich so ein Parlament
wünschen. Selbst wenn Ihr Parlamentsbau für Vietnam ein transparenter, moderner ist - das will ich Ihnen gar nicht abstreiten -, dann steht er doch im
Widerspruch zu dem System, von dem dieses Gebäude benutzt wird. Sie können doch nicht sagen, Ihnen sei egal, was dort stattfindet.
Gerkan : Sage ich auch nicht.
Ingenhoven: Doch, das sagen Sie!
Gerkan : Nein.
Ingenhoven: Doch, doch. Sie sagen das.
Gerkan : Ja, ja, er weiß alles, was in meiner Seele ist.
Ingenhoven: Sie haben gesagt, wenn man es nur demokratisch genug baut, dann ist es in Ordnung. Aber es ist nicht in Ordnung.
Gerkan : Sie versagen politischen Bereichen auf unserer Weltkugel - und dazu gehört Vietnam, das zunächst von den Franzosen, anschließend auch von den
Amerikanern mit Bomben plattgemacht wurde, das seine Entwicklung zu einer humanen Gesellschaft mit einem Rückstand von mehreren hundert
Jahren gegenüber Europa begonnen hat -, Ländern wie diesen versagen Sie die Chance, sich zu etwas zu entwickeln, was bei uns eine lange Zeit
gebraucht hat.
Ingenhoven: Nein, ich versage nur meine Mithilfe dabei! Weil ich nicht sicher bin, zu was diese Mithilfe missbraucht wird.
Gerkan : Was für eine Mithilfe denn? Was ist denn der Missbrauch?
Ingenhoven: Es wäre doch auch nicht so, dass, wenn Sie selbst das Parlament nicht bauen würden, deswegen keins gebaut wird. Die würden doch auch selbst ein
Parlament zustande kriegen.
Gerkan : Das glaube ich eben nicht. Wir beteiligen bei unseren Verfahren in Vietnam oder in China immer auch inländische Architekten. Aber so wie es ein
Defizit in der gesellschaftspolitischen Entwicklung gibt, gibt es auch ein Defizit in der baukulturellen Entwicklung. Wenn man Entwürfe aus diesen
Ländern sieht, machen die sich sehr oft durch dekorative Elemente wichtig, sie vernachlässigen den Kontext zwischen Funktion, Form, Inhalt sowie
die Verträglichkeit mit der Umgebung. Die konzeptionelle Denkweise, wie wir sie in Europa gewohnt sind, ist in diesen Ländern nicht so ausgeprägt.
Ingenhoven: Dennoch meine ich, dass ein Architekt, der sich entscheidet, irgendwo zu bauen, sich auch extrem abhängig macht von den Entwicklungen dort. Was
machen Sie denn, wenn morgen in Vietnam irgendein Aufstand irgendeiner Minderheit blutig niedergeschlagen wird? Dann wird man doch entsetzt sein über Ihren Parlamentsbau.
Gerkan : Das ist doch nur Ihre plakative Lesart!
Ingenhoven: Ich hab nur ein gutes Gedächtnis. Jeder weiß, was wir mit dem Platz des Himmlischen Friedens verbinden. Ich würde mich nicht dazu hergeben, auf
diesem Platz ein Gebäude zu bauen, das zu nichts anderem als der Verherrlichung der chinesischen Staatskultur dient. Warum tun Sie es?
Gerkan : Mit dem Museum baue ich für eine 5000-jährige Geschichte in China eine Hülle. Für 5000 Jahre!
Ingenhoven: ... an einem Platz, an dem vor gerade mal 19 Jahren Studenten massakriert wurden. Der Standort macht das Museum besonders.
Gerkan : Wenn wir über die Frage der Verantwortbarkeit des Bauens für sogenannte Systeme, die wir nicht gut finden, diskutieren, dann müssen wir uns auch
anschauen, was die Geschichte mit Bauten macht. Nahezu alles, was heute an wesentlichen Baudenkmälern auf der Welt ist, ist mehr oder weniger
Tyrannen zuzuschreiben. Ich weiß, das ist eine sehr heikle Parallele, aber dennoch. Nehmen wir doch mal das Volksbegehren in Berlin in diesem
Frühjahr. Da ging es darum, den Tempelhofer Flughafen zu erhalten - einen der prägnantesten nationalsozialistischen Bauten. Schauen wir uns die
Regierungsbauten an, die heute in Berlin vo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von den Ministerien, benutzt werden. Es sind Nazibauten! In welchem
Maße haben denn diese Architekturen, die sicherlich aus einem Geist der Machtdemonstration erwachsen sind, diesen Geist in die Geschichte
getragen? Haben sie sich nicht im Gegenteil als eigenständige Objekte, als Hervorbringungen der Menschheit manifestiert? Haben sie sich nicht
losgelöst von all den geschichtlichen Lasten?
Ingenhoven: Ich erinnere mich lebhaft an die Diskussion, als Hans Kollhoff die ehemalige Reichsbank der Nazis für das Auswärtige Amt umbaute, wo sich alle
fragten, ob das jetzt weit genug weg ist von dem, was da vorher war. Da hat man sich sehr viel Mühe gegeben, alles 50 Jahre nachdem das gewesen
ist und man gewiss nicht mehr von einer Kontinuität des Systems sprechen konnte. Aber um bei China zu bleiben: Glauben Sie, dass das politische
System Chinas heute besser ist als das der DDR? Für die DDR hätte doch auch kein demokratischer Architekt einen Nationalbau entworfen.
Gerkan : Ja, das glaube ich.
Ingenhoven: Ich nicht. Die DDR hat auch nur ab und zu jemanden an der Grenze erschossen, und China erschießt auch nur ab und zu jemanden und nicht jeden
Tag. Die DDR hat auch gemeint, sie hätte eine Volkskammer und das wäre ein Parlament. Man glaubt heutzutage und hierzulande, man könne es
sich mit China leichtmachen. Deutsche Manager nehmen eine Menge Rücksicht, in der Hoffnung aufs große Geschäft. Politiker nehmen auch
Rücksicht, denen nehme ich es weniger übel, da geht es um geopolitische Erwägungen. Aber für mich als Privatmann besteht keine Verpflichtung, dort
zu arbeiten.
Gerkan : Warum machen Sie aus Ihrer eigenen Moral ein Postulat, das Sie hinausposaunen? Damit desavouieren Sie die Architektenschaft insgesamt. Diese
Diskussion ist dem Berufsstand bestimmt nicht nützlich. Was ist Ihr Motiv?
Ingenhoven: Es sind keine persönlichen Motive, ich wünsche mir schlicht und ergreifend, dass Architekten sich am intellektuellen Leben beteiligen. Sie würden es
doch völlig selbstverständlich finden, wenn Schriftsteller in Deutschland zu diesen Fragen eine Meinung haben, und das dürfen Architekten doch auch.
Ich glaube, dass Architekten viel zu selten in der Öffentlichkeit auch abseits ihres ureigensten Projektinteresses Stellung beziehen.
SPIEGEL : Herr von Gerkan, Sie werden im September in Hamburg eine Bauakademie eröffnen, in der es darum gehen wird, dass der architektonische
Nachwuchs lernt, sich auf das Arbeiten im Ausland einzustellen. Könnten Sie sich vorstellen, dass auch ein Dozent Christoph Ingenhoven dort antritt?
Gerkan : Ich glaube, er wird nicht kommen, denn die Studenten werden zur Hälfte Asiaten, zur anderen Hälfte Deutsche sein ...
Ingenhoven: ... das ist unfair! ...
Gerkan : ... weil es uns darum geht, das Erfahrungspotential, das wir mittlerweile seit vielen Jahren gewonnen haben, an die nächste Generation weiterzugeben.
Und ich gehe davon aus, dass - ob nun weitere Moralapostel auftauchen oder nicht - die ganze Welt auch weiterhin ein Betätigungsfeld für Architekten sein muss. Ansonsten ist es natürlich Sinn und Zweck jeder akademischen Einrichtung, polare Auffassungen miteinander streiten zu lassen, denn nur aus diesen Meinungsverschiedenheiten lernt ein junger Mensch, sich ein eigenes Urteil zu bilden.
SPIEGEL : Herr Ingenhoven, was würden Sie an einer solchen Akademie am liebsten unterrichten, wenn Sie die Wahl hätten und eingeladen würden?
Ingenhoven: Ich unterrichte gar nicht, das unterscheidet mich von Herrn von Gerkan. Und ich finde es auch absolut bewundernswert an ihm, mit welcher
Konsequenz er das getan hat in seinem Leben. Dass es eine solche Akademie geben wird, finde ich erst mal faszinierend, ich finde auch das private Engagement absolut lobenswert. Dennoch möchte ich hier etwas geraderücken: Dass Sie mir unterstellen, dass ich keine Chinesen mag, ist nicht fair. Ich zweifle daran, dass es die richtige Haltung ist, zu sagen: "Ich muss nur die Klappe halten und weiter alles Mögliche bauen, dann kommt die Demokratie schon von selbst." Die Demokratie ist noch nie von selbst gekommen!
Gerkan : Die Rolle der Verweigerung ist immer die einfachere. Die Konsequenz aus diesem sehr überheblichen Blickwinkel von Herrn Ingenhoven ist letztlich
Eiserner Vorhang, Boykott, Blockade. Und das hat keinen Nutzen. Der chinesischen Regierung muss man zugutehalten, dass sie in der Lage war,
1,3 Milliarden Menschen zu mehr Wohlstand zu verhelfen, zu mehr Freiheit, zu mehr Bekenntnis zum eigenen Staat. Sie hat das Riesenreich unter
Kontrolle, und zwar in einer Kooperation mit der ganzen Welt, mit Russland, mit den USA, mit Europa. Wenn bei jeder geringsten Erschütterung allein
an den Finanzmärkten die ganze Welt aus den Angeln zu brechen droht, ist es doch sicher sinnvoller, darüber nachzudenken, was man tun kann, als
darüber zu richten, was man besser lassen sollte.
SPIEGEL : Herr von Gerkan, Herr Ingenhoven, wir danken Ihnen für dieses Gespräch.
Das Gespräch führten die Redakteurinnen Susanne Beyer und Annette Bruhns.
Gipfeltreffen der geplagten Architekten: Pierre de Meuron, Meinhard von Gerkan und Christoph Ingenhoven verantworten die größten und schwierigsten Bauprojekte
des Landes.
Die drei Architekten, die sich vor ein paar Tagen im SPIEGEL-Gebäude in Hamburg trafen, gehören zu den renommiertesten der Welt. Wie kann es sein, dass
diese Großmeister jeweils für Baustellen verantwortlich sind, auf denen seit Jahren sehr viel schiefgeht? Was sind die Gründe, dass öffentliche Baustellen in
Deutschland so oft zu Schauplätzen von Katastrophen werden? So unterschiedlich die Projekte der drei Architekten sind, so ähnlich sind die Probleme: Verzögerungen bis hin zu Baustopps, explodierende Kosten um viele hundert Millionen Euro. Stuttgart 21 wird identifiziert mit dem 53-jährigen Architekten
Christoph Ingenhoven; dieser ist allerdings nur für den Bau des Hauptbahnhofs zuständig. Der Flughafen Berlin-Brandenburg wurde vom Hamburger Architektenbüro
Gerkan, Marg und Partner geplant, federführend war der 78-jährige Meinhard von Gerkan, der 2012 von der Flughafengesellschaft hinausgeworfen und in diesem Jahr wieder zurückgeholt worden ist. Die Elbphilharmonie schließlich wurde vom Schweizer Architekturbüro Herzog & de Meuron entworfen, die Baudurchführung
übernahm der Konzern Hochtief, mit dem Pierre de Meuron, 63, und sein Partner lange zerstritten waren. Die Honorare für alle zuständigen Architekten und
Generalplaner betragen im Falle der Elbphilharmonie 93,9 Millionen Euro, beim Stuttgarter Hauptbahnhof 36 Millionen Euro. Für den Berliner Flughafen lasse sich
laut Gerkan derzeit keine Summe ermitteln.
SPIEGEL : Herr de Meuron, Herr von Gerkan, Herr Ingenhoven, der Ruf der Architektur in diesem Land ist schlechter denn je. Welche Mitschuld tragen Sie?
Gerkan : Es ist der große Fehler, sich freiwillig als Galionsfigur herzugeben. So wissen alle, auf wen sie schießen müssen. Wir sind diese Galionsfiguren, nicht
die Bauherren und nicht die Baukonzerne. Und wir haften für alles.
De Meuron: Ist der Ruf wirklich so schlecht?
Ingenhoven: Ich muss sagen, der Ruf ist nicht schlecht, außerhalb Deutschlands sogar exzellent.
SPIEGEL : Menschen gehen wegen Ihres Bahnhofs, Herr Ingenhoven, auf die Straße. Die drei Baustellen, über die wir reden, sind die bekanntesten in
Deutschland, über sie wird weltweit geredet, weil dort lauter Katastrophen passieren.
Ingenhoven: Was ich bestätigen kann, ist, dass es darüber in Deutschland eine hektische politische Diskussion gibt. Aber ich glaube nicht, dass der Ruf der
Architektur tatsächlich beschädigt wird.
SPIEGEL : Sie sind Architekten, aber in diesen Fällen auch Generalplaner, die mit den Bauherren und Baufirmen zusammenarbeiten. Da läuft bei Elbphilharmonie,
Stuttgart 21 und dem Flughafen in Berlin viel schief.
Ingenhoven: Herr von Gerkan hat gesagt, man ist Galionsfigur. Man ist das auch, weil man gebeten wird, das Projekt in der Öffentlichkeit zu vertreten. In Stuttgart
ging die ganze Geschichte im Jahr 1995 los, und sie wird frühestens um das Jahr 2021 beendet sein. Wenn Sie heute bei Wikipedia die Projektkosten
abfragen, wissen Sie, dass die Bahn früher gesagt hat, das kostet 2,5 Milliarden Euro. Heute reden wir von 5, vielleicht 6 Milliarden. Wir sprechen also
von einem Projekt mit einer Bearbeitungszeit von 25 Jahren und einer Verdoppelung der Kosten. Im Verhältnis zu dem, was vor 25 Jahren ein VW Golf
gekostet hat und was er heute kostet, ist das angesichts weitreichender Änderungen und Gesetzesverschärfungen vertretbar.
SPIEGEL : Sie finden den Preis von - derzeit auch nur geschätzten - 6,5 Milliarden Euro akzeptabel?
Ingenhoven: Ja. Und ich glaube, dass dieses Land nur überleben kann, wenn es solche Projekte baut.
SPIEGEL : Herr de Meuron, halten Sie den Preis für die Elbphilharmonie, zurzeit sprechen wir von 865 Millionen Euro, für angemessen?
De Meuron: Es ist unbestritten, dass der Ablauf des Projekts alles andere als ideal war. Das ist sehr bedauerlich, insbesondere für den Steuerzahler. Wir sind
darüber nicht weniger unglücklich als die Stadt. Solche Kosten- und Zeitüberschreitungen haben wir in dem Ausmaß auch noch nie erlebt.
SPIEGEL : Können Sie uns sagen, wie viel die Elbphilharmonie Ihrer Ansicht nach hätte kosten können?
De Meuron: Ob die Elbphilharmonie billiger hätte gebaut werden können, ist heute eine hypothetische Frage. Das Projekt hat seit dem ersten Entwurf unendlich v
viele Änderungen erfahren und wurde um erhebliche Zusatzwünsche wie einen weiteren Konzertsaal ergänzt. Entscheidender ist doch, was die Stadt
am Ende für ihr Geld bekommt und was die Elbphilharmonie den Bürgern wirklich bedeutet, wenn sie in Betrieb gegangen ist.
Ingenhoven: Du darfst die Frage also nicht beantworten, Pierre.
De Meuron: Doch, weil es die Wahrheit ist!
Ingenhoven: Ich würde sagen: Niemals kostet das über 800 Millionen. An dieser Stelle, auf diesem Raum kann man gar keine 800 Millionen verbauen, es muss
also ein Teil der Summe im Verfahren, im Zeitverzug begründet sein.
De Meuron: Was es völlig unnötigerweise teuer macht, ist die Juristerei und alles, was daraus folgt, Zeitverzögerungen, Projektstreitigkeiten und sogar Stillstand
haben maßgeblich dazu beigetragen, dass der Preis in dieser Größenordnung angekommen ist. Schauen Sie diese Tasse hier an, die vor mir steht.
Sie symbolisiert jetzt mal die Elbphilharmonie. Man sagte anfangs, sie muss weiß sein und irgendwie Tee beinhalten. So in etwa wurde damals
ausgeschrieben. Aber wie groß sie sein soll, dass es noch eine Untertasse geben soll und möglicherweise noch einen Löffel, das hat niemand gesagt.
Und wenn das nicht alles drin ist im Leistungsverzeichnis, dann können Sie weder guten Gewissens einen Preis festlegen noch feste Terminpläne
vereinbaren. Was damals fehlte, war die Zeit für eine sorgfältige Planung. Das hat die Politik jetzt und spät gelernt, jedenfalls in Hamburg.
SPIEGEL : Die Leute erwarten vom Architekten aber, dass er sagt, was machbar ist. Und welche Budgets realistisch sind. Dass er sich wehrt, wenn zu niedrige
Summen genannt werden.
De Meuron: Das haben wir getan. Ständig. Mündlich, schriftlich und zum richtigen Zeitpunkt: Bitte nicht ausschreiben, keine Aufträge vergeben, macht eine
saubere Planung. Das können wir belegen, das ist alles im parlamentarischen Untersuchungsausschuss aufgearbeitet worden.
Ingenhoven: Pierre hat recht. Das läuft oft so. Die Politik als Bauherr lässt einen Generalunternehmer auftreten, und der sagt, das mache ich dir bis dahin fertig,
und das kostet die Summe x. Mangels hinreichender Planungstiefe weiß zu diesem Zeitpunkt aber niemand, wie viel in dem Paket wirklich drinsteckt.
SPIEGEL : Herr de Meuron hat das Projekt 2003 gemeinsam mit Investoren der Öffentlichkeit vorgestellt. Damals hieß es, die Stadt müsse nur das Grundstück
hergeben und ansonsten nichts bezahlen. Das Gebäude selbst koste 40 Millionen Euro, aber die würden die Investoren anders einwerben. Die Zahl von
nur 40 Millionen Euro stand im Raum - und Sie waren ja dabei, Herr de Meuron.
De Meuron: Wir haben solche Zahlen nie genannt.
Gerkan : Herr de Meuron, Ihr ursprünglicher, später mit einer Medaille ausgezeichneter Investor hat sehr wohl den Eindruck erweckt, als koste das alles die
Stadt nichts. Und dann gab es nur noch die höchsten Ansprüche: Der damalige Bürgermeister Ole von Beust beispielsweise wünschte sich den
weltbesten Akustiker.
SPIEGEL : Bald hieß es, das Ganze koste 187 Millionen Euro, 77 davon habe die Stadt zu tragen. Dann wurden immer wieder neue Zahlen genannt. Herzog & de
Meuron waren nicht mehr die Galionsfiguren, sondern die Buhmänner.
De Meuron: Zu Ihrem Punkt, Herr Kollege Gerkan - das war nie mein Investor. Und zu der Buhmann-Theorie: So sehen wir uns nicht.
Gerkan : Ein Bauprojekt läuft nicht so von A bis Z, alles schön der Reihe nach. Die meisten Planungen fangen hinten an. Das Erste, was ein Bauherr wissen
will: Wann ist es fertig? Das Allerletzte, was ihn interessiert, ist, wie es aussieht und wie es ausgestattet ist.
SPIEGEL : Und was es kostet, interessiert ihn auch nicht?
Gerkan : In Berlin hatte der Bauherr, also der Bund und die Bundesländer Berlin und Brandenburg, die aberwitzige Idee, dass der Flughafen sich selbst
refinanziert, und zwar durch Passagiergebühren. Jeder Passagier, der den Flughafen betritt, sollte vorher eine Eintrittskarte bezahlen. Die notwendige
Höhe des Preises für die Eintrittskarte sollte jeder der zwei Generalunternehmer, die sich mal beworben hatten, für sich ausrechnen, dies aber ohne
eine vernünftige Zahlenbasis zu haben: 5 Millionen Passagiere oder 20 Millionen? Zugleich überschlugen sich die Änderungswünsche des Bauherrn.
SPIEGEL : Kann man als Architekt aussteigen, wenn man merkt, dass alles schiefläuft?
De Meuron: So etwas würden wir nie tun. Stellen Sie sich vor, was für eine Empörung entstanden wäre, wenn wir uns einfach aus dem Staub gemacht hätten, weil
uns Entscheidungen nicht passen. Aussteigen hätte signalisiert, dass wir nicht bereit sind, Verantwortung zu tragen.
SPIEGEL : Es hätte auch Leute gegeben, die gesagt hätten: mutig!
De Meuron: Das glaube ich nicht. Wir sind mutig, weil wir in dem Projekt geblieben sind. Wir nehmen eine Verpflichtung nicht nur dem Bauherrn, sondern auch der
Stadt gegenüber wahr. Wir verstehen uns als Partner unserer Bauherren und haben jetzt eine gute Lösung gefunden, das Gebäude ist 2016 fertig zur
Übergabe.
SPIEGEL : Sie bauen für eine Öffentlichkeit, die das alles bezahlen muss und es eigentlich nicht mehr will.
De Meuron: Ich habe vorhin gesagt, es ist bedauerlich, sehr sogar, ich kann es leider nicht ändern.
SPIEGEL : Nun ist ein neuer Vertrag ausgearbeitet worden zwischen der Stadt als Bauherrn, dem inzwischen spanisch geführten Konzern Hochtief und Ihnen.
Hochtief bekannte sich nun, etwas spät, zur Zusammenarbeit mit Ihnen.
De Meuron: Genau so ist es, eine gegenseitige Wertschätzung konnte etabliert und damit Vertrauen geschaffen werden, das wichtig für die zukünftige
Zusammenarbeit ist. Jetzt ist das Projekt besser verzahnt, und die Stadt wurde durch Hochtief von den Risiken entlastet. An dieser Einigung waren wir
als Architekten intensiv beteiligt. Der jetzige Bürgermeister Olaf Scholz hat die Elbphilharmonie zur Chefsache gemacht und sich wirklich gekümmert.
Er war ein knallharter Verhandlungspartner und hat die Stadt bestens vertreten.
SPIEGEL : Lange war der CDU-Bürgermeister Ole von Beust zuständig, seit 2011 ist es der von Ihnen so gelobte SPD-Mann Olaf Scholz - und der hat nun wieder
198 weitere Millionen zugesagt und noch dazu auf Schadensersatzforderungen verzichtet. Manche halten das für waghalsig.
De Meuron: Das sollen andere beurteilen. Experten halten die neue Lösung für den einzig gangbaren Weg. Dazu bietet der Vertrag ein hohes Maß an Sicherheit.
Ingenhoven: Auch ich habe nie einen Grund gesehen, aus dem Projekt in Stuttgart auszusteigen. Nie. Wir sind ja als Generalplaner nur für das eigentliche
Bahnhofsgebäude verantwortlich. Dort belaufen sich die Steigerungen gegenüber dem Kostenvoranschlag auf unter zehn Prozent, wir sind also fast im
Preis. Vergleichen Sie das mit anderen Projektteilen in Stuttgart, also mit dem Tunnel beispielsweise, mit den Strecken, mit der Logistik. Hätte man
das so weit voraus im gleichen Detaillierungsgrad geplant, hätte man viel näher an den Schätzungen liegen können. Das hätte vorausgesetzt, dass
man erheblich höhere Vorkosten hätte tragen müssen, das war von der Politik nicht gewollt.
SPIEGEL : Bahn-Chef Rüdiger Grube sagt, wenn er das vorher alles gewusst hätte, wäre es nie zu diesem Projekt gekommen.
Ingenhoven: Die Distanzierung ist Ausdruck einer damals verständlichen persönlichen Frustration. Das kann man verstehen, wenn man wie er mit dem Tod bedroht
wird. Und das ist natürlich auch ein Ausdruck der Frustration über die politischen Verhältnisse, dieses Projekt beinahe dem Ehrgeiz einzelner Grüner
geopfert zu haben. Zu sagen, man würde das Projekt unter den heutigen Bedingungen nicht mehr machen, heißt nicht unbedingt, dass man es nicht
für sinnvoll hält. Eine Minderheit hat dafür gesorgt, dass es zehn Jahre länger dauert und deutlich teurer wird.
SPIEGEL : Sehen Sie! Architektur sorgt in diesem Land dauernd für Ärger.
Ingenhoven: In dem Schlichtungsverfahren sagte jemand, sie hätten gern den zusätzlichen Bahnhof am Flughafen um ein paar hundert Meter verschoben. Kein
Problem, das können wir machen, das kostet nur ein paar hundert Millionen mehr. Alle wollen das Ergebnis der Schlichtung umsetzen, aber zahlen
will niemand. Ja, Jungs, das ist echter Kindergarten.
SPIEGEL : Welche Möglichkeiten gibt es für Architekten, so etwas zu verhindern?
Gerkan : Ich möchte erst einmal ein Missverständnis ausräumen. Es kursiert immer der Begriff der Kostenexplosion. Und der provoziert die Menschen. Darunter
versteht jeder: Man nennt die eine Summe, und nachher kostet ebendieses Projekt eine viel höhere. In Wahrheit werden da Elefanten mit kleinen
Mäuschen verglichen. Ein Beispiel: Beim Flughafen in Berlin beinhalten die Versprechungen des Bundes und der Länder Berlin und Brandenburg
gegenüber den Bürgern 139 Millionen Euro für Schallschutz, und zwar nicht am Flughafen, sondern an den Wohngebäuden der Umgebung. Die von der
Flughafengesellschaft beauftragten Maßnahmen entsprachen nicht den aktuellen Schallschutzanforderungen. Nun muss der Lärmschutz mit 591
Millionen Euro Mehrkosten verbessert werden. Noch eins: Die Größe des Flughafens war ursprünglich mit 200 000 Quadratmetern konzipiert und hat
heute 340 000 Quadratmeter. Das ist nicht mehr derselbe Flughafen. Es wurden immer neue Bedürfnisse angemeldet.
SPIEGEL : Es kommt vor, dass Hamburger Kinder in Containern unterrichtet werden. Für die Elbphilharmonie aber sind 865 Millionen Euro da.
Ingenhoven: Das findet niemand cool. Es ist aber bei der Elbphilharmonie so, dass der öffentliche Bauherr nicht in der Lage war, rechtzeitig stopp zu rufen, zu
sagen, wir nehmen uns Zeit, um unsere Fehler in den Griff zu bekommen und, eine Verzögerung und begrenzte Kostensteigerung hinnehmend, wieder
in geordnete Bahnen zu gelangen.
SPIEGEL : Herr de Meuron, sehen Sie das auch so?
De Meuron: Bedauerlicherweise ja. Komplexe Bauprojekte beinhalten immer Risiken, man kann sie aber minimieren. In Hamburg war das Vertragsgefüge so
kompliziert, dass das Projekt für die Stadt kaum noch steuerbar war.
Ingenhoven: Der Bauherr hätte sagen müssen: Wir haben da einen riesigen Fehler gemacht. Und wenn er merkt, es geht einfach nicht mit dem General-
unternehmer, dann schmeißt er ihn raus. Das hätte das Anerkenntnis sein müssen, weil man damit den größeren Schaden verhindert. Das gilt wohl
auch für den Flughafen.
SPIEGEL : Was genau?
Ingenhoven: Man hätte zugeben müssen, dass die Brandschutzpläne ungenügend waren. Aber Politiker wollen das nicht, sie verlieren dann ihr Amt, denn sie
müssten ja der Öffentlichkeit eine unternehmerische Strategie vermitteln - wir geben jetzt zwar mehr Geld aus, auch brauchen wir länger, aber dafür
haben wir die Probleme danach auch im Griff.
SPIEGEL : Verführt auch der vermeintlich unerschöpfliche Steuertopf dazu, sich nicht an Absprachen zu halten?
Ingenhoven: Nein, es verführt die Unkenntnis der politisch besetzten Aufsichtsgremien dazu. Warum sitzt Herr Wowereit im Aufsichtsrat des Flughafens? Warum
ist nicht der Vorstandsvorsitzende des Frankfurter Flughafens Aufsichtsratschef in Berlin geworden?
SPIEGEL : Weil er nicht der Bauherr ist, und weil der Bauherr mitreden will.
Ingenhoven: Aber der Chef aus Frankfurt hätte wenigstens Ahnung.
SPIEGEL : Die Fehler werden nur von anderen gemacht, nie von Architekten?
Ingenhoven: Diejenigen, die für diese Ideen werben, auch die Architekten, entfalten natürlich eine gewisse Verführungskraft. Wenn man dem erliegt und diese
Projekte baut, dann nimmt man die Risiken in Kauf. Risiken gibt es immer.
SPIEGEL : Aber was ist Ihr Risiko? Ihr Honorar steigt, wenn das Projekt teurer wird.
De Meuron: Nein. Wir sind mit unserem Honorar nicht prozentual an den Baukosten beteiligt. Und wir tragen zahlreiche wirtschaftliche Risiken: Wenn der Bau nicht
fristgerecht fertig wird und funktioniert, kostet das pro Tag Strafe. Nicht zuletzt stehen wir für das Projekt mit unserem Namen ein. Aber Ihre Frage ist
doch, ob wir Fehler machen. Natürlich machen wir die. Aber wir lernen daraus. Wieso sind die Namen von Architekten wie uns bekannt? Nicht weil wir
keine Fehler gemacht haben. Wir sind bekannt, weil die Projekte öffentlich diskutiert werden, und im Fall der Elbphilharmonie wird das
Architektonische positiv diskutiert.
SPIEGEL : Warum hat man fünf Jahre gebraucht, um die Notwendigkeit einer Neuordnung zu erkennen?
De Meuron: Wir haben immer wieder davor gewarnt, dass da etwas falsch läuft. Mündlich und schriftlich ging das an alle Projektpartner, ich habe auch persönlich
den damaligen Bürgermeister ausdrücklich darauf hingewiesen.
SPIEGEL : Wir haben ein paar strukturelle Probleme feststellen können. Das eine: Es wird immer zu früh und zu niedrig budgetiert ausgeschrieben.
De Meuron: Das kann man so sagen.
SPIEGEL : Und die Politiker sind keine Fachleute, maßen sich aber Kompetenz an. Und die Architekten schaffen es nicht zu sagen: so nicht.
Ingenhoven: Wir müssen eine Runde mehr drehen bei der Antwort auf die Frage, warum das so ist. In der Bundesrepublik hat es nach dem Krieg eine Sonder-
konjunktur gegeben. Die spätere Überkapazität wurde verdeckt durch die Wiedervereinigung, aber sie war da, nach wie vor, und hat dazu geführt, dass
die Verhältnisse völlig versaut sind. Viele Leute in der Branche sind bereit, sich in Projekte hineinzudrängen zu Preisen, von denen sie wissen, dass
sie die nicht halten.
Gerkan : Aber diese Baukonzerne haben volles Vertrauen in ihre Abteilung für Nachtragsverhandlungen, also in die Abteilung, die aggressiv nachträgliche
Forderungen stellt. Diese Konzerne kommen schon an ihr Geld.
Ingenhoven: Ich würde sagen, es handelt sich um eine Nachtragserfindungsabteilung.
Gerkan : Nachtragserfindung? Sehr schön.
Ingenhoven: Sobald ein Vertrag unterschrieben ist, kämpfen die intelligentesten und erfahrensten Menschen innerhalb der Baukonzerne dafür, dass sie viel mehr
Geld aus diesem Projekt herausbekommen, als vorgesehen war. Die Folge ist, dass beim Bauherrn und den Architekten und bei den Generalplanern
ebenfalls die intelligentesten Menschen damit beschäftigt sind, das abzuwehren.
Gerkan : Sie müssen bedenken, dass es um gigantische Projekte geht, da entstehen spezielle Probleme. In Berlin brauchen wir eine Entrauchungsanlage, die
sicherstellt, dass mehrere 10 000 Menschen in einem Brandfall durch den Rauch nicht ums Leben kommen. Die beiden großen Firmen, die es für die
Steuerung von Anlagen dieser Art gibt in Deutschland, Bosch und Siemens, waren nicht in der Lage, diese in einer angemessenen Zeit auch zu
erstellen. Einer der Gründe war die Festlegung der Politik, nach der diese Anlage an zwei Unternehmen vergeben werden musste. Dies ergab
Kompatibilitätsprobleme der Systeme, als ob in einem Auto vorn ein Opel und hinten ein Mercedes steckte. Aber das Auto fährt nicht und hat massive
Umplanungen zur Folge, mit Zeitverlust und Mehrkosten.
SPIEGEL : In Berlin wurden solche Aufträge von Wowereits Flughafengesellschaft vergeben. Es gibt keine Garantie dafür, dass die Entrauchungsanlage in
absehbarer Zeit betriebsbereit ist und der Flughafen auch mal eröffnet werden kann.
Gerkan : So weit wollen wir nicht gehen. Die meisten Autos fahren, wenn sie lange genug getestet werden.
Ingenhoven: Wenn Gerkan Glück hat, funktioniert es. Wenn er Pech hat, ändert sich die europäische Brandschutznorm, und er muss neu bauen. So machen wir
es zurzeit. Wir haben in Stuttgart zum zweiten Mal eine neue Brandschutznorm im Bahnhof zu erfüllen. Die letzte Steigerung bestand unter anderem
darin, dass die Brandrettungszeiten halbiert wurden und die relevante Brandlast verdoppelt. Wir haben es mit einer Potenzierung des Problems zu tun -
und das berücksichtigen Sie mal in der Planung.
SPIEGEL : Potenzierungen von Problemen überall: Am Flughafen in Berlin haben die Techniker nicht einmal den Lichtschalter gefunden, sie wissen nicht, wie sie
im verwaisten Gebäude das Licht ausschalten können.
Gerkan : Ja, das passiert, wenn Sie alle Leute von der Baustelle jagen und niemand mehr da ist, der weiß, wo der Lichtschalter ist.
SPIEGEL : Und dann heißt es, es gibt so viele Fehler, die man nicht beheben kann, man müsste den Flughafen am besten abreißen und neu bauen.
Ingenhoven: Haben Sie mal privat gebaut? Ich schon, und ich habe - offen gesprochen, wie ich das von fast jedem Bauherrn vermute - meinen Kostenrahmen und
meinen Terminplan nie so ganz in den Griff gekriegt. Ich bin heute noch dabei, die Haustechnik zu regulieren. Natürlich habe ich auch etwas an den
Grenzen des Möglichen entlanggeplant.
SPIEGEL : Das heißt also, Sie halten es für völlig normal, dass auf Baustellen nichts klappt? Das werden nicht viele verstehen.
Ingenhoven: Natürlich haben wir die Verpflichtung, dies alles zum Funktionieren zu bringen, und das beweisen wir ja auch bei Großprojekten auf der ganzen Welt.
Aber ein iPhone funktioniert doch auch nicht immer, obwohl das eine Weltmarke ist, obwohl es eine Schweinekohle kostet und ein Wahnsinns-Image
hat.
SPIEGEL : Und?
Ingenhoven: Warum soll denn etwas, was gigantisch viel größer als ein iPhone ist und was man erst in die Welt bringen muss, sofort zu 100 Prozent funktionieren?
Pierre hat gesagt, er macht auch Fehler. Ich würde noch weitergehen und sagen, das System impliziert die Fehler. Sie können das gar nicht ohne
Fehler und Schwierigkeiten machen. Der Fehler ist, dass man das nicht kommuniziert und dass man es nicht gemeinsam angeht, sondern gegen-
einanderarbeitet.
De Meuron: Man muss die Fehler erkennen, das ist der erste Schritt. Ich glaube, bei der Elbphilharmonie war außerdem die Selbstkritik auf einem sehr niedrigen
Niveau. Ich als Schweizer sollte keine Betrachtungen über Deutschland anstellen.
SPIEGEL : Doch, bitte.
De Meuron: Für mich war etwas immer unverständlich: Wieso hat Deutschland, das Land, das halb Europa trägt, diese Probleme bei komplexen Bauvorhaben? Ich
behaupte, Bauen ist Teamwork, so wie Fußball. Wenn Sie im Fußball nicht alle gemeinsam den Sieg wollen, dann scheitern Sie. Da können Sie die
teuersten Spieler haben. Das heißt, es geht nur mit einem gemeinsamen Ziel, mit Teamgeist. Wenn beim Bauen aber jeder nur seine eigenen
Interessen vertritt, kommt es zur Eskalation.
SPIEGEL : Diese Haltung ist in Deutschland ausgeprägt?
Ingenhoven: Ich glaube, dieses Land zahlt einen hohen Preis für seinen Erfolg. Und das zeigt sich im Zwischenmenschlichen und dem Geschäftsgebaren, das
daraus resultiert. Wir haben viel in Australien und in den USA gebaut. Das sind bestimmt nicht alles Weicheier dort, aber ich sage Ihnen: Der
gegenseitige Respekt ist da deutlich größer. Alle wissen, jeder muss Geld verdienen. Hier aber hat man das Gefühl, Unternehmer dürfen kein Geld
verdienen.
De Meuron: Es ist aggressiver in Deutschland. Man kann das auch an der Anwaltsdichte messen. Ich kenne keine härteren Vertragspartner als die Chinesen, aber
die haben immer noch ihren Konfuzius im Hintergrund und wollen, dass der Ton freundlich bleibt. Wir hatten in Asien nach Vertragsabschlüssen nie
mehr mit einem Anwalt zu tun.
SPIEGEL : Herr von Gerkan, Sie fliegen bald zum Sultan von Oman, Sie bauen im Ausland ganze Städte. Wie wichtig ist Ihnen ein einzelnes deutsches Projekt?
Gerkan : 50 Prozent unserer Vorhaben sind in China, weitere 25 Prozent in anderen Ländern und die restlichen 25 Prozent in Deutschland. Ich baue überall
gern, aber die Bauaufgabe in Berlin kann ich mir nicht schönreden.
SPIEGEL : Der Sultan von Oman wird für Sie ein angenehmerer Gesprächspartner sein als Wowereit?
Gerkan : Das will ich stark hoffen.
SPIEGEL : Sollte man von Anfang an Mediatoren einschalten? Schon der Turmbau zu Babel scheiterte nicht, weil die Leute nicht bauen konnten, sondern weil sie
sich nicht mehr verstanden haben.
De Meuron: Ich bin kein Freund von Mediatoren. Ich bin auch kein Freund von zu vielen Experten, beide tragen null Verantwortung und kosten zusätzliches Geld.
Projektpartner, die sich auf ein gemeinsames Ziel verpflichtet haben, handeln verantwortungsbewusst, in anderen Ländern klappt das ja auch.
SPIEGEL : Stuttgart 21 hat solche Probleme in der Öffentlichkeit, weil es fünf oder mehr Milliarden Euro kostet, aber am Ende der Zug auch nur wenige Minuten
schneller ist.
Ingenhoven: Das ist nicht mein Job, herauszufinden, wie viel Minuten mehr man von da nach dort braucht. Der Zweck des neuen Bahnhofs ist, Stuttgart wieder auf
die Landkarte Europas, in ein funktionierendes Hochgeschwindigkeitsnetz zu heben und durch die unter der Erde verlegten Gleise Platz und Ruhe zu
schaffen in dieser beengten Stadt.
SPIEGEL : Den leeren Flughafen in Berlin zu putzen kostet im Monat 162 000 Euro.
Gerkan : Schrecklich. Meine Information im Moment ist, aber das wechselt täglich: Der Stillstand kostet pro Monat 20 Millionen Euro. Sie müssen sich
vorstellen, dass da ein ganzes Jahr lang kein Bauarbeiter unterwegs war. Zum Verzweifeln.
Ingenhoven: Wir drei hier sind keine Zyniker. Wir sind ehrlich bemüht, das Richtige und Gute zu tun. Und es ist hart, was wir erleben müssen. Sie fragen, wie viele
Minuten spart man überhaupt durch den neuen Bahnhof. Aber ich finde, ich habe ein Recht darauf, in solchen Diskussionen nicht behandelt zu werden
wie jemand, der nicht zwei und zwei zusammenrechnen kann. Das finde ich respektlos.
SPIEGEL : Das heißt, die Leute sollen den Experten alles glauben?
Ingenhoven: Nein, aber man soll nicht von vornherein glauben, dass die Leute nur lügen. Wenn ich bei den öffentlichen Diskussionen in Stuttgart als Lügner
bezeichnet wurde, habe ich einen Teil meiner Energie darauf verwendet, dem, der das sagte, keine runterzuhauen.
SPIEGEL : Die Finanzkrise hat viel verändert, wir denken anders über Geld, über Fortschritt nach. Brauchen wir diese Großvorhaben wirklich?
Ingenhoven: Vorsicht! Natürlich verursacht es der Gesellschaft Schmerzen, wenn man einen Containerhafen baut und die Elbe dafür ausbaggert. Aber wenn wir
diese Schmerzen nicht auf uns nehmen - was dann? Stillstand? In Stuttgart hat eine lautstarke Minderheit von alten Menschen Stimmung gegen das
Projekt gemacht. Wir reden von Menschen, die den Bauzaun dekorierten wie bei Prinzessin Dianas Beerdigung. Es kann nicht sein, dass 20 Prozent
der Bevölkerung über die Zukunft aller bestimmen.
SPIEGEL : Aber Hamburg, Stuttgart und Berlin funktionieren bisher gut. In Hamburg gibt es eine gute Musikhalle, Stuttgart hatte unlängst seinen normalen
Bahnhof, Berlin brauchte am ehesten einen großen Flughafen, aber mit drei Flughäfen ging es früher doch auch. Der Flughafen Tegel, von Herrn von
Gerkan gebaut, wird sogar sehr geliebt.
De Meuron: Die Elbphilharmonie ist von den Hamburgern gewollt und entschieden worden. Es ist ein Projekt von unten nach oben und nicht von oben nach unten.
Wenn sie fertig ist und die Konzerte klingen, werden die Hamburger den Ärger irgendwann vergessen und die Elbphilharmonie lieben, davon bin ich
überzeugt.
SPIEGEL : Haben Sie eine Lösung, wie Architekten, Bürger, Politiker aus diesem Schlamassel wieder herausfinden?
Gerkan : Lösungen zu entwickeln und sie auszusprechen ist das eine. Sie zu praktizieren in einer politischen Landschaft, die an einen Vier-Jahres-Rhythmus
gebunden ist, das andere. Politiker sind darauf angewiesen, sich in ihren Legislaturperioden mit Großprojekten zu profilieren.
Ingenhoven: Die Lösung ist, im Vorfeld intensiver zu planen.
Gerkan : Das hört sich wie ein Patentrezept an, ist aber keins. Die reine Wahrheit bringt einen in diesem Metier nicht weiter. Die Oper in Sydney wäre nie
genehmigt geworden, wenn man von Anbeginn an gewusst hätte, was sie kosten würde. Das geht nur mit falschen Unterlagen.
SPIEGEL : Mit einer Lüge am Anfang?
Gerkan : Ja. Nur mit einer Lüge.
Ingenhoven: In diesem Spiel der Politiker sollen wir alle zu Marionetten gemacht werden. Ich glaube nicht, dass das die Lösung ist, zu lügen, ich habe auch keine
Angst, ehrlich zu sein. Die Leute sind, wenn es sein muss, leidensfähig. Sie haben die Bankenrettung hingenommen. Da kommt es auf die Ehrlichkeit
und das Geschick desjenigen an, der den Leuten ein Projekt verkaufen muss. Da sind die Architekten gefragt.
De Meuron: Ich bin für Offenheit. Auch aus reinem Selbstschutz. Die Lüge fällt immer auf einen zurück. Ich würde die Lüge nie unterstützen, ich würde auch die
List nie unterstützen. Chinesen sprechen von List, sie ist dort völlig normal, es ist nicht verwerflich, den anderen im besseren Glauben zu lassen. In der
europäischen Kultur aber würde ich die List nicht anwenden. Öffentlichkeit hier ist ein gläserner Käfig.
Gerkan : Sie, Herr de Meuron und Herr Ingenhoven, machen in der Tat einen integren Eindruck, aber ich könnte aus dem Stegreif ein Dutzend Großprojekte
nennen, bei denen es immer mit einer Lüge begann: Das ICC in Berlin wurde für 120 Millionen Mark geplant und mit 924 Millionen Mark abgerechnet.
Meinen Sie, dass alle an die 120 Millionen geglaubt haben?
Ingenhoven: Die Frage ist: Sollte es so laufen?
Gerkan : Wir Menschen dürfen uns nicht besser darstellen, als wir sind. Wir, Herr Ingenhoven, haben uns einmal bei einem SPIEGEL-Gespräch über China
gestritten, ob wir deutsche Architekten da bauen sollten. Da kann ich nur sagen: In China gibt es diese Lügen nicht, weil man da niemanden belügen
muss. Da entscheidet einer, und er entscheidet das, was er will, weil das die Partei mitträgt.
Ingenhoven: Stopp. Ich finde, wir müssen eine Lanze brechen für demokratische Verfahren. Ich bin zwar der Leidtragende in diesem demokratischen Exzess in
Stuttgart, aber ich glaube trotzdem, dass diese Verfahren dazu dienen, Fehler zu verhindern. Städte sind voller Fehler, am Ende ist das demokratisch
erzeugte Ergebnis aber ein qualifiziertes. Shanghai dagegen ist in zehn Jahren völlig ruiniert worden.
SPIEGEL : Der rasche Wiederaufbau im Nachkriegsdeutschland wird die "Zweite Zerstörung" genannt: Architekten und Planer verschandelten die Städte. Ihre
Unwirtlichkeit ist ein deutsches Trauma.
De Meuron: Deutschland ist nicht gefangen in einem Trauma. Berlin ist ein tolles Beispiel dafür, wie man mit den Herausforderungen der Geschichte umgehen
kann. Wir können nicht immer nur von Venedig oder Paris träumen. Eine normale Stadt ist an sich nicht schön, sie ist das Resultat aller Kämpfe und
Schwierigkeiten.
SPIEGEL : Wenn Sie gewusst hätten, welche Kämpfe es in Hamburg geben wird, hätten Sie sich ferngehalten?
De Meuron: Die Elbphilharmonie ist städtebaulich von großer Bedeutung, sie verbindet die Hafen- und die Bürgerstadt. Wir stehen voll hinter ihr und würden es
genau so noch mal machen.
SPIEGEL : Ihr Entwurf, Herr Ingenhoven, stammt ja aus dem Jahr 1997. Würden Sie ihn heute anders zeichnen?
Ingenhoven: Ich würde das nicht von jedem Projekt sagen, aber für Stuttgart kann ich sagen, ich würde es heute genau so machen.
SPIEGEL : Herr von Gerkan, sind Sie noch im Reinen mit Ihrem Entwurf?
Gerkan : Nicht ganz. Ich bedaure über alle Maßen, dass wir so lange Wege einplanen mussten. Flughäfen sind zu riesigen Einkaufszentren verkommen.
Wissen Sie: Das schönste Flughafengebäude ist für mich das TWA Flight Center am Kennedy Airport in New York, das 1962 nach einem Entwurf des
finnischen Architekten Eero Saarinen fertiggestellt wurde. Die Abflughalle sieht aus wie ein Flugdinosaurier, wunderbar. Die Halle steht heute leer. Die
Bedingungen des Abfertigens ändern sich unentwegt, fast jährlich. Das hat uns zu der Erkenntnis gebracht, dass ein Flughafen so neutral wie möglich
sein muss, damit das Gebäude nicht in Konflikt gerät mit irgendwelchen formalen Ansprüchen. Dach, Stützen, Schluss, Aus.
SPIEGEL : Herr Ingenhoven, Herr de Meuron, Herr von Gerkan, wir danken Ihnen für dieses Gespräch.
Das Gespräch führten die Redakteurinnen Susanne Beyer und Ulrike Knöfel in Hamburg.
시달리고 있는 건축가들 정상들과의 만남: 피에르 드 모룬, 마인하르트 폰 게르칸 그리고 크리스토프 잉엔호펜은 (독일) 국내 가장 대규모, 가장 어려운 건축 프로젝트들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며칠전 함부르크 슈피겔 사옥에서 만남을 가진, 이 세 건축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들로 손꼽힌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 위대한 거장들이 이끄는 공사현장들이 수년째 난항을 겪고 있는 걸까? 무엇이 독일 공공 공사현장이 이토록 자주 재난의 현장으로 부각되게 하는 원인일까? 세 건축가의 프로젝트는 매우 다양하지만, 한편 그들이 마주하는 문제들은 아주 유사하다: 공사지연에서부터 공사중단, 수백만 유로씩 불어난 공사비용. 슈트트가르트 21은 53세의 건축가 크리스토프 잉엔호펜과 함께 기억되지만, 사실 그는 역의 공사만 맡고 있을 뿐이다.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은 함부르크 건축사무소 '게르칸, 막 파트너쉽'이 계획했고, 78세의 마인하르트 폰 게르칸이 이끌고 있다. 그는 2012년 공항사 측에 의해 프로젝트에서 밀려났다가, 올해 다시 프로젝트에 재투입되었다. 마지막으로 엘프필하모니는 스위스 건축사무소 '헤어조그 & 드 모룬'이 설계했고, 투자회사 호흐티프가 공사를 맡았는데, 이 회사와 피에르 드 모룬(63세) 그리고 그의 파트너는 이미 오래전에 결별했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건축가와 프로젝트 매니저들의 보수는 엘프필하모니의 경우 9390만 유로(1400억원 전후), 슈트트가르트 역 3600만 유로(540억원 가량)에 달한다. 베를린 공항의 경우, 게르칸은 현재 액수를 공식적으로 확정짓지 않았다.
슈피겔 : 드 모룬씨, 게르칸 씨, 그리고 잉엔호펜씨. 현재 국내 건축의 위신은 그 어떤때보다 땅에 떨어져버렸는데요. 어떤 책임을 느끼시나요?
게르칸 : (고작 건축가에 불과한 우리가) 자발적으로 대표인양 나선게 큰 실수였죠. 결과적으로 모두들 총구를 누구에게 겨냥해야되는지 알게됐죠.
우리가 과녁이 된에요. 건축주도 아니고, 건설회사도 아니죠. 우리가 모든 책임을 떠안은 셈입니다.
드 모룬 : 그렇게나 (독일 건축의) 입지가 나빠졌나요?
잉엔호펜: 솔직히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말씀드려야 겠군요. 사실 독일밖에서는 아주 훌륭합니다.
슈피겔 : 잉엔호펜씨, 당신의 역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하러) 거리로 나서는데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이 세 곳의 공사현장은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공사현장입니다.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난에 가까운 엄청난 잡음 때문에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있기도 하지요.
잉엔호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에 관해 독일 내에서 격렬한 정치적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독일) 건축의 명성에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슈피겔 : 당신들은 건축가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들 같은 경우에는 건축주와 시공회사와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이기도 한데요.
엘프필하모니, 슈트트가르트 21, 베를린 공항 프로젝트들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잉엔호펜: 게르칸씨께서도 언급하셨듯이 우리는 뱃머리의 장식과 같은 존재입니다.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대표해서 하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기도 하죠.
슈트트가르트의 경우 역사는 1995년으로 거슬러올라가죠.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빨라야 2021년에나 끝이 날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위키페디아에서 프로젝트 비용을 검색하시면, (독일) 철도청은 이전에 25억 유로라고 말했던 것을 알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현재 우리는 50억, 60억 유로를 이야기하죠. 우리는 25년이라는 시간에 걸친 프로젝트 비용이 두배 비싸진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25년전에 폭스바겐 골프가 얼마였고, 오늘날 얼마인지를 비교해보면, 수많은 계획 수정과 법이 까다로와 진것을 고려해볼 때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드 모른 : 아닙니다. 우리는 공사경비에서 일정비율을 수입으로 받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수많은 경제적 위험을 안고 있죠: 우리가 공기를 맞추지 못한다거나,
건물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면, 하루하루가 벌금으로 계산되죠. 최소한 우리는 프로젝트를 우리 이름을 걸고 보증을 하죠.
그렇지만 당신의 질문은 우리가 잘못을 했냐는 거였죠. 당연히 우리도 실수를 합니다. 그렇지만 실수를 통해 배우죠. 왜 우리같은 건축가가 유명할까요?
우리가 실수를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대중들 앞에 토론하기 때문입니다.
엘프필하모니의 경우도 건축적으로 매우 긍정적으로 논의되었었습니다.
슈피겔 : (프로젝트) 재정비의 절실함을 알아차리는 데까지 5년이나 걸리는 이유는 뭘까요?
드 모른 : 우리는 뭔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다고 수없이 경고를 했었죠. 모든 프로젝트들에게 말로도, 그리고 글로도 알렸었죠.
제가 직접 당시 시장에게 그에 대해 경고한 적도 있습니다.
슈피겔 : 우리는 몇가지 구조적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한가지가 항상 너무 일찍, 너무 싸게 예산을 뽑는다는 거군요.
드 모른 :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슈피겔 : 그리고 정치가들은 전문가도 아니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반대로 건축가들은 '그렇게는 안된다'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거군요.
잉엔호펜: 질문에 대한 답으로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 한번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전후 독일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했는데요.
이후에 생산과잉은 통일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 되었지만, 여전히 존재했고, 이는 (수요-공급)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려버렸습니다. 이 바닥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프로젝트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대기해 있는 겁니다.
게르칸 : 한편으로 건설회사도 추가조율을 담당하는 부서를 너무 신뢰하죠. 이 부서가 공격적으로 추가요구를 제시하고, 건설회사들은 금새 그들의 금액에 도달해 있죠.
잉엔호펜: 제 생각에는 추가발명부서라고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게르칸: 추가발명? 아주 적합한 비유군요.
잉엔호펜: 계약이 체결되기가 무섭게, 건설회사의 유능하고 경험있는 사람들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프로젝트에서 뽑아내려고 달려들죠.
그러면 건축주, 건축가, 그리고 프로젝트 매니저들도 역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나서서 방어하기에 바쁜겁니다.
게르칸 : 거대한 프로젝트에는 특별한 문제들도 발생한다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베를린에서는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재시 질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연기를 빼내는
시설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설을 제어하는 것을 담당하는 회사는 독일에 보쉬와 지멘스 두개가 있는데, 두 회사 모두 주어진 시간에 해낼 수 없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로 이 시설을 두 회사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결정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시스템 호환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한대의 차에 앞에는 오펠이 뒤에는 벤츠가 조립된 꼴이죠.
그렇지만 차는 굴러 가지 않았고, 결국 시간낭비, 돈낭비를 하며 엄청난 규모를 다시 계획해야 한겁니다..
슈피겔 : 베를린에서는 보베라이트의 공항 측에서 그런 주문이 나갔습니다.
연기를 뽑아내는 시설이 가까운 미래에 작동하리라는 보장도, 공항이 오픈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는데요.
게르칸 : 너무 멀리는 가지 않겠습니다.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충분히 오랜 테스트를 거치고 나면, 주행을 하죠.
잉엔호펜: 게르칸씨가 운이 좋으면, 괜찮을 것이고. 운이 없으면 유럽 방화법규가 바뀌겠죠. 그러면 새로 지어야 합니다. 현재 상황이 그렇습니다.
우리도 슈트트가르트 역을 벌써 두번째로 새로운 방화법규에 맞추어 손보았습니다. 지난번에 강화된 요건 중에는 화재시 구조 시간이 반으로 줄어든 것도 있는데, 덕분에 화재시 부담도 두배로 늘어났습니다. 우리는 잠재적인 문제들을 안고 일하는 겁니다. 계획 과정에 이걸 한번 고려해보세요.
슈피겔 : 문제의 가능성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베를린 공항에서는 기술자들이 전등 스위치를 못찾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버려진 건물에서 어떻게 불을 꺼야할지 전혀 모른 겁니다.
게르칸 : 네, 현장에서 인부들을 쫓아내고, 어디에 스위치가 있는지 더이상 아는 사람이 없으면, 그런 일이 발생하는 거죠.
슈피겔 : 그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아서, (짓고 있던 현재의) 공항을 헐고 새로 짓는데 최선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잉엔호펜: 혹시 개인적으로 건물을 지어본 적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거의 모든 건축주들이 그런 것처럼, 저도 제 예산과 스케쥴을 정확히
마음먹은 대로 통제하는 것은 해내지 못했어요. 저는 오늘도 설비를 조절했습니다. 당연히 저도 가능한 경계를 따라서 계획하기는 하죠.
슈피겔 : 그 말은 공사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보신다는 뜻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은데요
잉엔호펜: 당연히 우리는 모든것이 잘 굴러가도록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세계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에서 이를 수행해왔죠.
그렇지만 아이폰도 항상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유명브랜드이고, 엄청나게 비싸고, 그토록 특별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도 말이죠...
슈피겔 : 그래서요?
잉엔호펜: 도대체 왜 아이폰보다 훨씬 거대하고, 처음 생산되는 제품이 100퍼센트 완벽하게 작동해야 한다는 거죠? 피에르도 말했듯이, 그도 실수를 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 계속 이야기를 하면, 시스템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우에도 실수나 어려움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다거나 협력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상대적으로 일을 한다는 점입니다.
드 모룬 : 일단은 실수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게 첫번째 단계죠. 제 생각에는 엘프필하모니의 경우 무엇보다도 자아비판이 매우 낮은 수준이었습니다.
스위스 건축가로서 제가 독일에 대해 평가를 하면 안될까요?
슈피겔 : 천만에요. 계속하세요.
드 모룬 : 제가 항상 궁금했던 것은, 도대체 왜 독일이, 유럽(연합?)의 절반을 짊어진 나라가 건축공사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안고 있는지 입니다.
제 생각에 건물을 짓는 일은 축구같은 팀웍 작업입니다. 당신이 축구를 하면서 승리를 함께 나누려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실패합니다.
팀에 몸값이 가장 비싼 선수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공동의 목표, 팀의 영혼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공사를 하면서 각자가 각자의 일에만 몰두한다면, 순식간에 상황은 나빠지죠.
슈피겔 : 독일의 태도가 인상적이었나요?
잉엔호펜: 제 생각에 이 나라는 성공을 위해 많은 댓가를 치뤄야 하죠. 이는 대인관계와 비즈니스에서도 나타나고, 곧 결과로 귀결됩니다.
우리는 호주와 미국에도 건물을 지었는데요. 물론 그곳에서도 모든것이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단언컨데, 서로간의 존중만큼은 그곳이 훨씬
낫죠. 모두들 각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는 기업가들은 돈을 벌면 안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드 모른 : 독일이 더 공격적입니다. 변호사 밀도를 비교해 볼수도 있겠죠. 저는 중국인들보다 까다로운 계약상대를 본 적이 없는데요, 그들은 그래도 여전히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친절한 톤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아시아에서는 계약이 끝난 뒤에 송사에 휩쓸릴 일은 없었습니다.
슈피겔 : 게르칸씨, 곧 오만의 술탄으로 출장을 가실텐데요. 당신은 외국에 도시를 짓기도 하십니다. 독일 국내의 개별 프로젝트들은 당신에게 얼만큼 중요한가요?
게르칸 : 우리 계획의 50%는 중국에서, 25%는 또 다른 외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25%가 독일에서 진행됩니다.
저는 어디든 좋지만, 베를린 공사에 관해서 만큼은 더 이상 미화해서 이야기 하기가 힘들군요.
슈피겔 : 오만의 술탄은 보베라이트씨보다는 편안한 대화 상대이기를 바랍니다.
게르칸 : 정말이지 제 바램이기도 합니다.
슈피겔 : 처음부터 중재자를 투입해야 할까요? 바벨탑만 해도, 인간들이 지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 간에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드 모룬 : 저는 중재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전문가도 별로이고요. 둘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추가비용만 더 들게 하죠.
공동의 목표를 책임으로 나눠진 프로젝트 파트너는 책임감을 의식한 행동을 하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다 잘 진행됩니다.
슈피겔 : 슈트트가르트 21은 5~60억 유로가 드는데 비해, 열차시간은 고작해야 몇 분 빨라지는 효과가 고작이라, 대중들 앞에 (설득의) 어려움이 있는데요.
잉엔호펜: 몇분이 더 걸리든, 그걸 해결하는 것은 제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역의 목적은 슈트트가르트를 유럽지도의 고속열차 네트워크 속에 잘 작동하도록 다시 엮어내는
동시에, 플랫폼을 지하에 뭍어 좁은 도시가 조용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슈피겔 : 비어있는 베를린 공항을 청소하는 데만도 매달 162 000유로가 드는데요.
게르칸 : 끔찍한 일이죠. 현재 제가 아는 정보가 그렇고, 매일 또 바뀝니다. 공사중단 상태도 매달 이천만 유로가 듭니다. 1년 동안 공사장에 인부가 없다고 상상해보세요.
기가 막힙니다.
잉엔호펜: 우리셋은 냉소주의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제대로 훌륭히 해내려고 정말로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겪어야만 하는 일들은 정말로 혹독하죠.
새 역을 짓는 다고 몇분이나 절약할 수 있냐고 물었죠?
그렇지만 저는 그런 토론에서 2 더하기 2를 계산할 수 없는 사람 취급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례한 태도입니다.
슈피겔 : 그말은 일단은 전문가를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잉엔호펜: 아니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사람들이 속인다고 생각해서도 안되겠죠. 제가 슈트트가르트 공개토론에서 거짓말쟁이로 지목되었을때, 저는, 그 말을 한 사람의 뺨을
갈겨주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슈피겔 : 금융위기가 많은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우리는 돈과 발전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대규모의 프로젝트가 정말로 필요할까요?
잉엔호펜: 잠깐만요! 컨테이너 항구를 짓고, 그러느라 엘베를 파내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에 고통스러운 일일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요?
그럼요? 공사중단? 슈트트가르트에서는 목소리 큰 소수의 늙은이들이 프로젝트 반대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우리는 공사장 울타리를 다이아나비의 장례식장 처럼 장식한 사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에요. 20%의 인구가 모든 사람들의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슈피겔 : 그렇지만 이제까지 함부르크, 슈트트가르트, 베를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함부르크에는 훌륭한 콘서트홀이 있고, 슈트트가르트도 이미 평범한 역이 있었고,
베를린도 큰 공항이 필요하긴 했지만, 지금껏 세개의 (작은) 공항으로 굴러가긴 했죠. 게르칸씨가 지은 테겔 공항은 매우 사랑받아 왔었죠.
드 모른 : 엘프필하모니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원해서 결정된 프로젝트였습니다. 위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결정된 프로젝트였습니다.
건물이 완공되고 콘서트가 열리면, 함부르크 시민들도 이 모든 분노를 언제가 잊고, 엘프필하모니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슈피겔 : 건축가, 시민들, 정치가들이 이런 곤경을 헤쳐나갈 방법을 갖고 계십니까?
게르칸 : 해법을 발전시키는 것과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하나죠. (그렇지만) 4년 주기에 묶여있는 정치판을 배경으로 이 일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입니다. 정치가들은 그들의 임기동안에 거대한 프로젝트 덕을 보는 방향으로 지시를 하죠.
잉엔호펜: 결국 답은 애초부터 인텐시브하게 계획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게르칸 : 이것은 확실한 처방 같지만, 사실 그렇지만 않습니다. 순수한 진실만으로는 이 바닥에서 계속 나아갈 수 없죠.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도 처음부터 얼마가 들지 알았더라면, 절대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에요. (의도적으로?) 틀린 서류로만 가능한 거죠.
슈피겔 : 그러니까 처음에는 거짓말로?
게르칸 : 네. 속이는 수밖에 없죠..
잉엔호펜: 정치가들의 이런 놀음에 우리 모두 꼭두각시가 되어야하는 거죠. 저는 속임수가 해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도 정직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상황이 닥치면 고통을 견뎌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은행구제금융도 받아들였습니다.
이 시점에 이 사람들에게 프로젝트를 팔았던 사람들의 정직함과 노련함에 주목하게 되고, 건축가들이 질문을 받게되는 거죠.
드 모른 : 저도 투명한 쪽입니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차원에서이기도 합니다. 거짓말은 항상 (결국) 되돌아오죠.
저는 거짓말이나 권모술수같은 것들은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권모술수가 아주 일상적이고, 부도덕한 일이 아니라, 타인을 좀더 쉽게 설득하는
방법이지요. 그렇지만 유럽문화 속에서 저는 절대 권모술수따위는 쓰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의 대중사회는 유리로 된 새장과도 같습니다.
게르칸 : 드 모룬씨, 잉엔호펜씨, 당신들은 정말로 도덕적인 인상을 주는군요.
그렇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도 당장 거짓말로 시작됐던 수십개의 대형프로젝트를 열거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의 ICC도 1억 2000만 마르크에 계획되어서 9억 2400만 마르크를 기록했었죠. 모든 사람들이 1억 2000만이라는 숫자를 믿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잉엔호펜: 그렇다면 질문은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는 거냐는 거죠.
게르칸 :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실제보다 미화해서는 안되죠. 잉엔호펜씨, 우리는 슈피겔 인터뷰에서 중국에 관해서, 독일 건축가가 중국에 진축하는 문제를 토론한 적이
있었죠. 최소한 중국에는 이런 종류의 속임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중국에서는 아무도 속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죠.
중국에서는 한 사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을 결정하죠. 당도 그것을 지지하기 때문입니다.
잉엔호펜: 잠깐만요. 제 생각에, 민주적인 절차를 위해 창을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저 스스로도 슈트트가르트의 민주적 절차에 애를 먹고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이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도시들에는 실수가 가득하지만, 결국에 민주적 과정을 걸쳐 생산된
결과물은 품질이 검증된 것입니다. 샹하이는 반대로 10년후면 완전히 폐허가 될 것입니다.
슈피겔 : 전후에 신속하게 이루어진 재건은 '2번째 파괴'라고도 일컬어집니다:
건축가들과 계획가들은 도시들을 흉하게 만들었고, 이 흉측함이 독일의 트라우마가 되었습니다.
드 모룬 : 독일은 아직 트라우마에 잡히지 않았어요. 베를린이 어떻게 우리가 역사적 요구를 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그 좋은 예죠.
항상 베네치아나 파리를 꿈꿀 수는 없죠. 보통의 도시는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 않지만, 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물입니다.
슈피겔 : 함부르크에 어떤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았더라면, 이 프로젝트를 멀리 했었을까요?
드 모룬 : 엘프필하모니는 도시계획적으로 아주 큰 의미를 지닙니다. 항구와 시민들의 도시공간을 잇는 곳이죠.
우리는 다시 프로젝트를 쫓아, 아마 또다시 똑같이 했을 겁니다.
슈피겔 : 잉엔호펜씨. 당신의 설계는 1997년의 것인데요. 오늘날이라면 다르게 설계하실 것 같은가요?
잉엔호펜: 모든 프로젝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지는 않을 거에요. 그렇지만 슈트트가르트에 관해서만큼은 단언컨대, 지금 다시해도 똑같이 그렇게 하겠어요.
슈피겔 : 게르칸씨, 아직도 당신의 설계에 만족(?)하십니까?
게르칸 : 완전히는 아니요. 저도 우리가 이렇게 먼길을 돌아야했던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공항들은 거대한 쇼핑센터들로 변해 버렸는데요.
그거 아세요? 제가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공항은 1962년 핀란드 건축가 에에로 사리넨이 설계한, 뉴욕 케네디 공항의 TWA 항공센터 입니다.
이륙장 홀은 꼭 익룡같이 생겼죠. 굉장합니다. 이 홀은 현재 비어있습니다.
완공의 조건은 거의 매년,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건물이 어떤 (법적) 규제의 충돌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공항은 가능한한 중립적인
따지고 보면 시간 여유가 꽤 많은 한 해였었는데...올해는 영화를 참 덜봤다... 그렇게 올해 본 몇편 되지 않은 영화 중 최악의 영화 '2012'
아무리 롤랜드 에머리히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고... 이런 종류의 영화는 이야기를 바랄 것 없이 그림만 보면 된다지만... 전인류의 목숨을 가지고 분탕질을 쳐놓고...툭 꺼내놓는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그만한 가치가 없는 이유로) 분노까지는 아니지만...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짜증과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에머리히가 독일 감독이라...도대체 독일 쪽은 영화를 어떻게 평하고 있는지 좀 궁금해서... 슈피겔 기사를 읽었는데...역시나 깃털보다 가벼운 영화라고 했던 이동진 기자의 평에 비하면...그냥 칭찬을 하고 말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부드럽다... 역시 독일 사람들 팔도 결국에는 안으로 굽는 거다...
슈피겔에서는 에머리히가 그의 영화들에서 현대 사회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구조를 산산조각낸다고 썼는데... 내가 보기에는 현대 사회의 일면을 시각적으로는 파괴하면서도 한편으로 에머리히만큼 철저하게 '미국' 현대 사회의 정치, 경제 구조에 빌붙어 있는 감독도 없는 듯하다...
사악한 외계문명으로부터 지구와 선량한 유목민을 구하는 듯 보이는 '스타게이트'는 사실 미군부대가 시공간을 초월해 우주 어느 별로 날아가...이집트 고대 문명을 날려버리고 금의환향하는 영화였고...
그의 출세작인 '인디펜던스 데이'는 전세계가 무력한 가운데... 미국 정부만이, 특히 대통령이 전투기까지 타고 직접 나서서 지구를 구해내 지구의 독립을 수호한다는 영화였고...
중요한 것은 크기라던...프랑스 정부의 비밀 핵실험으로 발생한 돌연변이 '고질라'는... 뉴욕 시내 구석구석에 기스를 좀 냈으나... 따지고 보면...핵문제에 대한 책임 문제는 고사하고...무능한 작전 사령관 하나 자르지 못하고 사라진 거대 도마뱀이였을 뿐이고...
북반구가 통째로 얼어붙어서...서구 사회의 종말을 그리는 듯 보이는 '투모로우'는... 나라가 없어져버린 마당에도...다른 나라에 부채 탕감을 운운하며 남의 나라에 뻔뻔하게 자리틀고 앉아, 철저하게 미국적인 태도로 끝을 맺는다...
그렇지만...이번 영화 2012야 말로...단순히 CG와 각종 재난의 집결판인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정리한 완성판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에서 에머리히는 중요한 것은 크기라는 모토에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라는 것을 덧붙인다...
창세기에서 신의 선택을 받아 살아남았던 노아와 달리 2012의 선택권은 정치권력과 자본력이 쥐고 있다...
미래 인류의 재건을 위해...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우수하게 선별되었다는 방주의 선발 탑승자들은 사실 정치와 자본의 경쟁사회의 승자들일 뿐이다.
(세계의 그 많은 관객들이...G8에 속하지 않은 지구상 대부분의 나라들은 대통령조차도 탑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러한 태도는 드라마를 끌고 나가는 소위 평범한...주인공 가족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비규환 속에서 공존을 위해 다른 이들에게 같이 도망칠 것을 제안하기는 커녕...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아주 자주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가며...그렇게 살아 남는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여전히 정치 놀이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실소의 정점은...
방주의 문을 여네...마네 싸우다가 세계 각국의 정상이 각국의 명예를 걸고...문을 열기로 선포하는 장면이었다...
국민들을 예지녁에 버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치가들이 도대체 더이상 명예를 걸 수있는 국가가 어디 있다는 것인가?
영화는 아프리카만이 유일하게 망망대해 위에 남은 땅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아프리카를 바라보며 끝난다...
나름 희망을 제시한답시는 영화의 끝이 더 짜증스러웠던 것은...
그 놈의 정치가들은 이제 아프리카 대륙에서...어처구니없이 땅따먹기를 하며 국가놀이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신대륙의 역사는 그렇게 반복될 것이고...
에머리히는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똑같이 반복해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캘리포니아에서 지구 종말이 시작되고... 존 쿠삭이 지도 한 장 얻겠다고 그 난리 중에 우디 해럴슨 찾으러 가기 전까지는 그나마 시각적 효과에 빌붙어 좀 볼만했었다...
그런데 재난의 규모 자체가 휴먼 스케일을 과도하게 벗어나...지도가 달라질 정도가 되기 시작하니... 컴퓨터 그래픽이 제 아무리 잘나도...더 이상 손아귀에 긴장을 쥐어줄 수가 없는 거다... 전인류 말살의 원망을 빗겨가기 위한 전략의 틈이다... 원망을 벗어났을 수도 있지만...그 틈으로 긴장까지 같이 빠져 나가 버렸다...
빌리언을 모아 만든 방주가 겨우 문 하나를 못닫아서 침몰하게 생긴 상황 같은 어이없는 헛점들은 일일이 다 열거할 필요도 없고...
스토리는 빼고 화면만 보자...고 해도... 그 화면을 보면서...두시간 반 동안 몸을 비비꼬고 있었으니... 충분히 실패한 영화다...
Hier entlang zum Weltuntergang
Wie
man Städte und Landstriche zerlegt, weiß er. Jetzt hat sich Regisseur
Roland Emmerich die ganze Welt vorgeknöpft. Sein Endzeitspektakel
"2012" zeigt die Apokalypse als bildmächtigen Untergangsporno mit der
schlichten Botschaft: menschliche Zivilisation? Muss in den Müll.
Es
ist blöd gelaufen für Apokalyptiker, gerade in den letzten Jahren.
Dabei hätte es 1999 eigentlich klappen müssen: Der Millenniumswechsel
galt als todsicheres Datum fürs Weltenende. Und dann? Nichts. Kein
Computergau, kein Zusammenbruch der globalen Infrastruktur.
Stattdessen: Viel Party an Silvester, danach ging's weiter wie bisher.
Jetzt
kriegen die Untergangspropheten noch mal eine Chance: Der 21. Dezember
2012 ist das nächste Datum für den Superclash. Für diesen Tag sagten
die Maya das Ende der Welt heraus. Auch im chinesischen Orakelbuch
I-Ging und im Alten Testament soll es Hinweise auf das Datum geben.
Wenn
es auch diesmal nicht funktioniert, wenn die Zivilisationsmüden am
nächsten Tag wieder die verhasste Kultur vorfinden, inklusive
Straßenverkehr, Börsenkursen und Mikrowellenessen, dann können sie sich
wenigstens an Roland Emmerichs "2012" schadlos halten. Der Film ist
opulente Untergangspornografie, ein gigantomanisches Spektakel, bei dem
die Natur dem Menschen ordentlich Bescheid stößt.
Supervulkane
fetzen Kontinente auseinander, Gesteinsbrocken bombardieren die
verbleibenden Landmassen, und was dann noch nicht klein gekrümelt
wurde, kriegt die Himalaja-hohen Flutwellen ab. Das ist im Groben die
Handlung, und weil Grobheit und die von ihr ausgelöste Schaulust Sinn
und Zweck dieses Stadt-Land-Fluss-Zerknüllkinos ist, muss man sich
eigentlich nicht beschweren.
Diesmal
darf Emmerich seine Zerstörungswut allerdings noch umfassender als
bisher in Bilder fassen. Vorbereitet war man ja, durch jene
Blockbuster, mit denen der schwäbische Regiehandwerker soziale,
politische und kulturelle Strukturen zerlegte. War das nicht praktische
Architekturkritik, als Godzilla New York zertrampelte? Und als in
"Independence Day" das Weiße Haus explodierte: Ging da nicht auch die
verwaltete, entfremdete Welt zu Bruch?
Natürlich
muss, aus rein dramaturgischen Gründen, in diesem
Pulverisierungskintopp immer auch eine Erzählung über Menschen
vorkommen, die sich bewähren und ein Happy End hinkriegen. In "2012"
gibt es deshalb einen mäßig erfolgreichen Buchautoren, der seine
Familie vernachlässigt hat, im Angesicht globaler Auslöschung aber
seine Vaterqualitäten entdeckt.
Ihn
begleitet der Zuschauer wie den Helden eines Computerspiels über die
verschiedenen Levels der Zerstörung hinweg bis ins Finale, das auf
einer riesigen Arche stattfindet. Dort hat sich der Rest der Menschheit
versammelt, um, tja was eigentlich? Endlich mal die Sache mit dem
Umweltschutz ernst zu nehmen? Sich die ganzen Ungereimtheiten der
Zivilisation - Armut, Ausbeutung, Gewalt - vorzuknöpfen?
Der
Film endet hier, das ist konsequent, weil das Ausspinnen von Utopien
nicht auf der Agenda steht. Emmerichs filmische Logik konzentriert sich
auf die Kreation der Destruktion, und in der Aufwendigkeit, mit der
Orkane, Tsunamis und Erdbeben programmiert werden, liegt ein
vielsagender Widerspruch.
Eine Katastrophe namens Fortschritt
Kein
anderer Regisseur nutzt technologische Innovationen derart konsequent,
um seine Moderne- und Technikfeindlichkeit zu inszenieren. Die wahre
Katastrophe, das ist der Fortschritt. Zuletzt zeigte Emmerich das im
Prähistorienspektakel "10.000 B.C.": Da wurde der ägyptischen
Hochkultur mit maximaler Rechnerleistung von ein paar Mammutjägern der
Garaus gemacht.
Natürlich
speist sich das Katastrophengenre generell aus Ressentiments, es
verquirlt Schuldgefühle und Bestrafungsphantasien. Und es bestätigt das
magische Potential des Mediums: Die im Bild gebannten Schrecken sind
weniger schrecklich, wenn die Leinwand sie als Moment der Angstlust
gefangen hält.
"2012"
weitet die Grenzen des Genres jedoch ins Extrem. Denn diesmal sterben
nicht nur ein paar tausend Amerikaner oder Ägypter, diesmal sterben
Milliarden. Und mit ihnen die Institutionen, die Kulturen, die
Glaubenssysteme. In Italien zerbirst der Petersdom, kurz vorher geht
ein Riss durch Michelangelos "Erschaffung des Adam". Das ist die
Kernszene des Films: Die Schöpfung wird rückgängig gemacht, das Kino
ist eine gigantische Kulturrückbaumaßnahme und Emmerich ihr oberster
Stratege.
Sieh an: Der Untergang
Damit
dies darstellbar bleibt, ist man, was die filmische Perspektive angeht,
nie mittendrin, sondern letztlich nur dabei: als übergeordnetes Auge,
das das Versinken der Welt bezeugt. Immer wieder braust man mit einem
Auto, einem Flugzeug oder sonst einem Vehikel durch die zerberstende
Welt, bis die Kamera aufzieht, und man sich gottgleich über das
apokalyptische Szenario erhebt. Dann schwebt man im Nirgendwo und
bestaunt die sich selbst verschlingende Erde.
Aus
Sicht der Menschen, sagen diese Bilder, ist die Apokalypse nur halb so
viel wert. Wer die Endzeit zeigen will, braucht Überblick. So kann die
Kamera immer neue, prächtige Tableaus der Auslöschung malen, bis von
der Welt nur noch ein einziger bleischwarzer Ozean übrig ist.
Roland
Emmerich hat die Genesis revidiert. Was bleibt so einem noch? Warten
auf den Untergang? Zwei Jahre können eine lange Zeit sein.
Von Daniel Haas 출처: http://www.spiegel.de/kultur/kino/0,1518,660118,00.html
세계멸망을 향한 길
그는 어떻게 인간이 도시와 자연환경을 어떻게 박살낼 수 있는 지, 아주 잘 안다.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이번에는 전세계를 주물렀다. 그의 세계멸망 블록버스터 '2012'는 아포칼립스를 강렬한 이미지로 가득찬 세계종말 포르노로 그렸다. 아주 간단한 메세지를 담아서 '인류 문명? 쓰레기통 속으로'
최근 몇 년은 종말론자들에게 아주 불리하게 돌아갔다. 사실 1999년에 이미 끝이 났어야 했다. 밀레니엄은 당시 세계 종말의 정확한 날짜일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컴퓨터 대란도 없었고, 전세계 인프라가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31일 곳곳에서 많은 파티가 열렸고, 그리고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세계종말의 예언은 또 다시 기회를 맞았다: 2012년 12월 21일이 다음 멸망의 약속일이다. 이날은 마야인들이 예언한 날이다. 중국의 예언서 'i-Ging'과 고대전서에도 이날이 언급되어 있다. 이번에도 예언이 어긋난다면, 고단한 인간 문명의 어제와 오늘이, 끔찍하게 지겨운 문화의 찌꺼기들, 도로, 증권, 인스턴트 음식 이런 것들이 내일도 계속된다면, 적어도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를 애교있게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화려한 종말 장면의 포르노그라피이자, 초대형 원자폭탄급 스펙타클이다. 그 속에서는 자연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화산이 대륙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암석들은 그나마 남아 있는 땅 위로 뻥튀기처럼 튀어 오르며, 히말라야는 거대한 쓰나미에 뒤덮힌다. (그렇지만) 이것은 대략적인 태도이다(큰 그림이다). 개략적이고 거리를 둔 관조적 자세는 도시와 대륙, 강을 산산조각 내는 가운데에 숨은 의도이자 수단이다. 그래서 관객은 사실 그것에 대해 불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는 에머리히가 그의 파괴욕을 더 포괄적으로 영상에 담을 수 있었다. 이미 전작들을 통해 준비는 충분히 했다. 전작들에서 이 슈바벤 출신 영화쟁이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구조를 산산조각낸 바 있다. 고질라가 뉴욕을 뛰어 다닐때의 건축적 크리틱이 소용이 있었을까?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백악관이 폭발할 때, 기타 다른 문명 세계는 파괴되지 않았었는가?
당연히 극적인 이유로 난장판 속에서 살아남고 해피엔딩을 맞는 인간들의 이야기도 서술해야 한다. 그래서 '2012'에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작가가 등장한다. 그는 그동안 가족들에 소홀하다가 지구멸망 직전에야 비로소 스스로의 부성애를 발견한다. 관객은 그의 모험에 동행하며, 그가 컴퓨터 게임 속의 영웅처럼 여러 레벨의 재난을 극복하고, 어떻게 파이널 단계인 거대한 방주에 오르게 되는지를 보게 된다. 그 곳에 남은 인류가 모인다. 글쎄...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마침내 환경보호를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려고? 가난과 착취, 폭력과 같은 인간 문명의 쓰레기들을 좀 분류해보려고?
영화는 여기에서 끝이 난다. 유토피아의 연출은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은 당연한 결과다. 에머리히의 영화적 논리는 파괴의 창조에 집중되어 있다. 태풍에, 쓰나미에, 지진에 각종 재난을 총동원한 가운데 그의 논리는 여러모로 모순적인 상황에 맞닥뜨린다.
진보라는 이름의 '재앙' 세상 어느 감독도 아직, 현대와 기술에 대한 반발을 연출하기 위해, 기술적 창의성을 이런식으로 지속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진정한 재앙은 진보이다. 가장 최근에 에머리히는 선사시대 스펙타클 "10.000 B.C."에서 이를 이미 선보인 바 있다. 이 영화에서 고도의 계산력을 지닌 이집트의 선진 문명은 몇몇 맘모스 사냥꾼의 손에 놀아난다.
당연히 이 재난영화를 보다보면 거부감이 들수도 있다(?). 이 영화는 원죄의식과 심판의 환상을 산산조각낸다. 그리고 미디어의 마술과 같은 잠재력에 쐐기를 박는다. 스크린에서 공포의 순간을 잡아 그림으로 보면 덜 끔찍하다.
'2012'는 장르의 경계를 심하게 넘어섰다. 이번에는 단순히 몇천명의 미국인이나 이집트인들이 죽아나가는게 아니라 수십억이 죽는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들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종교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성베드로 성당이 무너지고, 그 직전에는 미켈란제로의 '아담의 탄생'에 금이 간다. 이 장면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창조'가 과거형이 되었다. 극장이 거대한 문명재건의 현장이 되고, 에머리히가 최고 감독관이 되는 것이다.
멸망을 보자 이것을 그리기 위해서, 등장인물들은 영화적인 관점에서 절대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자리에 간신히 존재할 뿐이다. 세계가 가라앉는 것을 목격하는 객관적 시점으로서만 말이다. 카메라가 이동해, 인간들이 전지적 입장으로 아포칼립스의 시나리오 위에 설 때까지, 주인공들은 반복해서 차를, 비행기를 혹은 다른 교통수단을 타고 폭발하는 세계를 질주한다. 그리고는 주인공들은 허공을 부유하며 침몰해가는 대륙을 바라볼 뿐이다.
이 영화는 인간의 시각으로는 멸망이 겨우 절반을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멸망의 순간을 제시하고 싶은 이라면 거시적인 안목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카메라는 세상에서 시커먼 대양만이 남을 그 순간까지, 항상 새롭게 화려한 소멸의 장면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이다.
롤란드 에머리히는 창세기를 다시 썼다. 그럼 무엇이 아직 남았을까? 멸망? 2년은 긴 시간일 수도 있다.
Vor 100 Jahren wurde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geboren, der Hitler-Attentäter vom 20. Juli 1944. Nach dem Rummel um die Dreharbeiten für den Film
"Valkyrie" mit Tom Cruise in Berlin ist der Widerstandskämpfer endgültig zur Ikone geworden. Von Malte Herwig
Erst jetzt wohl ist dieses Leben endgültig Legende, erst jetzt ist dieser gute Deutsche jene universelle Lichtgestalt, die die globalen Phantasien beflügeln wird,
tapfer, von düsterer deutscher Romantik. Als Tom Cruise sich vergangene Woche aus Berlin verabschiedete, warf er dem deutschen Publikum geschichtspolitische
Kusshände zu: "Durch Stauffenberg habe ich mich mit der deutschen Seele beschäftigt. Ich bin demütig geworden." Cruise spielt Stauffenberg, und nun liebt er
Deutschland und die Deutschen.
Ein Superstar spielt einen Superhelden: Schließlich ließ sich sogar das deutsche Finanzministerium vom zwingenden Charme dieses Projekts erweichen und
erteilte dem US-Filmteam um Regisseur Bryan Singer ("Superman Returns") die Dreherlaubnis im historischen Bendlerblock, in dem Stauffenberg in der Nacht des
20. Juli nach dem gescheiterten Attentat hingerichtet wurde. Damit hatte ein monatelanger Streit um den Hollywood-Film "Valkyrie" sein versöhnliches Ende
gefunden.
Stauffenberg, endgültig Ikone. Schon früh steuerte dieses Leben auf heldenhafte Statuarik zu. Es gehört zu den Ironien in der Geschichte des deutschen
Widerstands, dass ausgerechnet die Nazis das erste Monument jenes Mannes errichten sollten, der es einmal auf Hitlers Leben absehen würde: Am 2. Dezember
1939 wurde in Magdeburg ein 40 Zentner schweres Pionierstandbild aufgestellt, für das Stauffenberg Modell gestanden hatte.
März 1934. Auf dem Hopfenboden einer verlassenen Brauerei in Bamberg steht ein junger Offizier in Wehrmachtsuniform. Hoch aufgerichtet, die linke Hand am
Koppelschloss, die rechte zur Faust geschlossen, den Blick wie geistesabwesend zur Seite gewandt. Geduldig lässt er sich fotografieren. Ein SA-Denkmal soll
entstehen, und der schneidige Oberleutnant ist ein Modell ganz nach dem Geschmack der Bildhauer.
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war durchaus zunächst ein Held, wie er im Bilderbuch des Deutschen Reiches stand. Der Spross einer alten schwäbischen
Adelsfamilie wurde am 15. November 1907 als drittes Kind des königlich-württembergischen Oberhofmarschalls Alfre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geboren. Als
1914 der Krieg ausbrach, soll der Sechsjährige eines Morgens zu seiner Mutter gerannt sein und sie gebeten haben, "heldisch" zu sein und ihn und seine Brüder
eines Tages auch in den Krieg ziehen zu lassen.
Obwohl sich der junge Schüler für Musik und Literatur begeisterte, entschied er sich für eine Karriere beim Militär und trat nach dem Abitur 1926 in die Reichswehr
ein. Er wolle "in seinem Berufe dem Staatswohl nützen", hatte der 14-Jährige in einem Schulaufsatz geschrieben. Das spartanische Heldenleben, das Stauffenberg
sich vom Militärdienst erhoffte, diese zutiefst romantische Idee des aufopfernden Dienstes für den Staat, stand nicht etwa im Gegensatz zu seiner Vorliebe für
Dichtung. Es entsprach genau den Gedanken, die der Dichter Stefan George seit Jahren in dem verschwörerischen Kreis predigte, der sich "das geheime
deutschland" nannte und zu dem Claus und sein Bruder Berthold 1923 stießen.
Die Stauffenberg-Brüder fühlten sich als Auserwählte und Nachfahren deutscher Kaiser: "Des Staufers und Ottonen blonde erben", wie der 16-jährige Claus in
einem Gedicht schrieb. George bestärkte sie in diesem Glauben und setzte sie als seine geistigen Erben ein. Noch während der Vorbereitungen für den Umsturz
1944 werden sich die Brüder mit der Planung einer Gedenkfeier für den 1933 verstorbenen George beschäftigen.
Stauffenbergs Verhältnis zum Nationalsozialismus war, wie bei vielen der Männer des 20. Juli, anfangs ambivalent. Er begrüßte Hitlers Ernennung zum Reichs-
kanzler und half bei der militärischen Ausbildung von SA-Mitgliedern. Doch bereits als er 1934 einem Freund aus dem George-Kreis Modell für jenes SA-Denkmal
stehen sollte, weigerte er sich, dabei eine SA-Uniform zu tragen. Er wird zur Ikone wider Willen, nicht ohne Eitelkeit. "Ich habe mich zwar mit meiner Verewigung
ausgerechnet als S.A. Mann noch nicht ganz abgefunden", schreibt Stauffenberg seinem Bruder Berthold, "tröste mich aber damit, dass es für die Nazi weit härter
ist als für mich." Als der Entwurf wenige Wochen später fertig ist, kommentiert er zufrieden, er sehe "recht unnazistisch aus".
1940 nahm Stauffenberg als Generalstabsoffizier am Frankreich-Feldzug teil, dessen rascher Erfolg auf deutscher Seite ihn noch einmal für Hitler begeisterte. Drei
Jahre später wurde er beim Rückzug von Rommels Armee in Nordafrika schwer verwundet und verlor die rechte Hand, ein Auge und zwei Finger der linken Hand.
Die Illusionen über Hitler und den Krieg hatte er zu diesem Zeitpunkt längst verloren.
Anders als sein Idol Stefan George, der sich nach Hitlers Machtergreifung lediglich vage äußerte, erkannte Stauffenberg, dass das "Dritte Reich" nicht das "Neue
Reich" Georges war, auf das er und seine Brüder gesetzt hatten. Bereits im August 1942 - also vor der Niederlage der deutschen Armee in Stalingrad - hatte
Stauffenberg Hitlers Krieg als "sinnloses Verbrechen" erkannt, wie aus einem russischen Vernehmungsprotokoll seines Vertrauten Joachim Kuhn hervorgeht, das
der Historiker Peter Hoffmann jetzt erstmals veröffentlicht hat*.
Es ist ein Dokument sittlicher Empörung. Lange galt das Hitler-Attentat als Aufstand der Militärs gegen die strategischen Fehler des Führers nach Stalingrad.
Kuhns Einlassung von 1944 unterstreicht jedoch, dass es die Empörung über den Mord an den Juden und die Verbrechen im Osten waren, die den Stauffenberg-
Kreis trieben.
Stauffenberg suchte Kontakt zu den Widerständlern um Generalmajor Henning von Tresckow und ließ sich nach seiner Verwundung in Afrika zum Allgemeinen
Heeresamt nach Berlin versetzen, wo er zur treibenden Kraft der Attentatsplaner auf Hitler wurde. Dabei diente die raunende Heimlichtuerei im Kreis der George-
Jünger den Stauffenbergs auch als Abschottung. Seit die Brüder zum George-Kreis gestoßen waren, schreibt Biograf Hoffmann, habe zwischen den Brüdern und
der übrigen Welt eine unsichtbare Wand gestanden, "durchdringbar nur für den, der den Gedanken Georges zugewandt war".
Doch der Versuch, Hitler am 20. Juli in der "Wolfschanze" durch eine von Stauffenberg eingeschmuggelte Bombe zu töten, schlug fehl. Noch in derselben Nacht
wurde Stauffenberg zusammen mit weiteren Mitverschwörern im Innenhof des Heeresamts hingerichtet.
Der Hollywood-Ruhm, der Stauffenberg nun sicher scheint, ist der erstaunliche Höhepunkt einer postumen Karriere, die alles andere als selbstverständlich schien.
Noch Anfang der sechziger Jahre hielt jeder vierte Deutsche Stauffenberg und seine Mitverschwörer für Verräter. Auch die 68er konnten mit dem militärischen
Widerstand gegen Hitler wenig anfangen: Im Kreis der Umstürzler fanden sich Antisemiten und ehemalige NS-Mitläufer.
Der Mythos der Männer vom 20. Juli wurde den Westdeutschen von oben verordnet. Konrad Adenauer, der sich 1946 vehement gegen die finanzielle Unterstützung
von Angehörigen der Widerstandskämpfer ausgesprochen hatte, verkündete pünktlich zum 10. Jahrestag des Anschlags, die "Opfer des 20. Juli" seien "der
Hochschätzung und Verehrung aller würdig".
Seitdem war der 20. Juli Chefsache. Der Gedenktag diente, so der Militärhistoriker Tobias Baur, "nach außen zur Widerlegung der Kollektivschuldthese, nach innen
zur Stiftung einer neuen Identität in einer Tradition der Freiheit". Von Carlo Schmid wurden Stauffenberg und seine Kameraden offiziell zu christusähnlichen Erlösern
stilisiert: "Der harte Lorbeer, den sie, einer Dornenkrone gleich, in ihre Stirne gedrückt haben", beschwor Schmid 1958, "hat die Schuld weggenommen, die auf uns
lastete." Ausgerechnet der ehemalige NS-Marinerichter Hans Filbinger sprach 1974 als Bundesratspräsident von der "Reinigung des deutschen Namens" durch die
Helden des militärischen Widerstands.
Verglichen mit derartigem Gedenktagsschwulst ist das Hollywood-Drehbuch zu "Valkyrie" von geradezu nüchterner Präzision - keine Spur von dem "grauenvollen
Kitsch", den Stauffenberg-Sohn Berthold von der Produktion befürchtet. Stattdessen: Stauffenberg als ernster, pflichtbewusster Familienvater und Offizier. Ein Held
fast wider Willen, der erst von seinem Bruder überzeugt wird, dass Hitler beseitigt werden müsse: "Jemand muss aufstehen und der Welt zeigen, dass nicht alle
von uns wie er sind."
Ohne Draufgängertum und markige Sprüche kommen auch die Verschwörer in "Valkyrie" nicht aus. "Someone is watching over that son of a bitch" ("Irgendjemand
beschützt diesen Hurensohn"), flucht der von Kenneth Branagh gespielte Mitverschwörer Henning von Tresckow gleich am Anfang des Films, nachdem Hitler wieder
einmal durch pures Glück einem Attentat entkommen ist. Ähnliches ist auch von Stauffenberg überliefert, der 1942 einen Kameraden gefragt haben soll, ob sich
denn in Hitlers Hauptquartier kein Offizier finde, "der das Schwein mit der Pistole umlegt!"
"So pathetisch es klingt", sagte Nina von Stauffenberg einmal über ihren Mann, "er ging bewusst den Weg eines Heldenlebens." Der tapferste Held ist der, der
bereit ist, für andere sein eigenes Leben zu opfern - das ist Legendenstoff, das war in der Antike nicht anders als heute im Kino.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을 기도했던 클라우스 쉥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100년 전 태어났다. 탐 크루즈 주연의 영화 '발키리'의 베를린 촬영 관련 소식들 이후로 이 반히틀러 지도자는 마침내 우상이 되었다. 글/말테 헤르빅
이제 막, 그의 삶은 마침내 전설이 되었다. 이제 막, 이 훌륭한 독일인은 황량한 독일 소설의 등장인물에서 전세계를 향해 판타지의 날개를 펼치는 빛으로 조명받게 되었다. 탐 크루즈는 지난주 베를린을 떠나면서, 독일 대중을 향해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담은 키스를 날렸다: "슈타우펜베르크를 통해 나는 독일의 정신에 몰두했고, 그리고 그래서 슬퍼졌습니다." 크루즈는 슈타우펜베르크를 연기했고, 그는 이제 독일과 독일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슈퍼스타가 슈퍼히어로를 연기했다 : 독일 경제부도 이 프로젝트의 거부할수 없는 매력에 결국 누그러졌으며, 브라이언 싱어 감독('슈퍼맨 리턴즈')의 미국 영화팀이 역사적인 장소인 벤들러블록에서 촬영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곳에서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 암살을 실패한 날 당일인, 7월20일 밤 처형되었다. 이것으로 몇달에 걸친 헐리우드 영화 '발키리'를 둘러싼 분쟁은 결국 화해의 결말을 찾았다.
슈타우펜베르크, 마침내 우상. 애초부터 그의 삶은 영웅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뜻밖에, 나치가 히틀러의 목숨을 노렸던 이 남자의 기념비를 먼저 세웠던 것은 독일 저항의 역사의 아이러니에 속한다: 1939년 12월 2일 막데부르크에서 40센트너(50.8 kg x 40) 무게의 선구자상을 세웠는데, 슈타우펜베르크가 그 동상을 위해 모델로 섰었다.
1934년 3월. 밤베르크의 옛 양조장, 홉이 깔린 바닥에 군복 차림의 한 젊은 장교가 서있다. 똑바로 서서, 왼손은 벨트 버클에 대고, 시선은 무심히 측면을 향한 채로. 끈기있게 그는 촬영에 임했다. SA-상이 하나 세워져야 했고, 깎아놓은 듯한 외모의 이 육군 중위는 조각가의 구미에 딱맞는 모델이었다.
클라우스 쉥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 베르크는 명백히 타고난 영웅이었다. 독일 제국의 그림책에 서있는 것처럼. 유서깊은 슈바벤지역(슈트트가르트 근처 일대) 명문가의 후예였던 그는, 1907년 11월 15일 왕립 뷔템베르크 궁정 상급장관, 알프레드 쉥크 그라프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셋째로 태어났다. 1914년 전쟁(1차 대전)이 발발하자, 6살박이는 어느날 아침 어머니에게로 불려갔고, 그녀는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영웅적' 삶과 훗날 전쟁을 이끌어 나갈 것을 당부했다.
어린 소년은 음악과 문학에 심취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 장교가 되기로 결정하고 1926년 대학입학시험 후에 제국군대에 입대했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통해 국가안정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고, 14살 소년은 학교 작문숙제에 썼다. 슈타우펜베르크가 군복무를 통해 꿈꿔오던 스파르타식 영웅적 삶, 국가에 대해 봉사하는 삶, 그리고 임무에 대한 이 뿌리 깊은 낭만적 이해는 그의 시에 대한 사랑과 배치되지 않았다. 그것은 수 년동안 (그가 참여했던) 지하조직의 복음자와 같았던 시인 슈테판 게오르그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비밀 독일'이라는 이름의 이 조직은 1923년 클라우스와 그의 형제 베르트홀트와 접촉했다.
슈타우펜베르크 형제는 그들이 선택된 자이고, 독일 황제의 후예라고 여겼다: "슈타우퍼와 오토넨의 블론드를 물려받은" 16살의 클라우스가 시에 썼듯이... 게오르그는 그들이 이러한 믿음을 갖는 것을 강화했고, 그들을 정신적 후계자로 길렀다. 1944년 암살을 준비하던 중에도 이 형제는 1933년에 죽은 게오르그를 추모하는 행사계획에도 열심이었다. 나치에 대한 슈타우펜베르크의 입장은 7월 20일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모순적이었다. 그는 히틀러의 제국 수상 임명을 환영했고, SA 돌격대원의 군교육을 도왔다. 그렇지만 1934년 게오르그 써클 중 일원이면서 SA-동상의 모델로 서야 했을 때, 그는 SA 유니폼을 입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선택받은 자라는) 허영심을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콘이 되었다. "나는 내가 갑자기 SA 의 일원으로 영원히 각인되는 것을 아직 완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 라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의 형제 베르트홀트에게 썼다. "그렇지만 그것이 나 자신보다 나치를 더 공고히 할 것이라는 것이 위안이 된다."라고 덧붙였다. 몇 주 후 디자인이 끝나고 나자 그는 만족해서 다시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나치스럽지 않아' 보인다.
1940년 슈타우펜베르크는 참모장교로 프랑스 전장에 참전하고, 이곳에서의 신속한 독일측 성과는 다시 한번 그가 히틀러에 열광하도록 했다. 3년 후 북아프리카의 롬멜의 군대에서 후퇴하면서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이 부상으로 오른손, 한쪽 눈 그리고 왼손의 두 손가락을 잃었다. 히틀러와 전쟁에 대한 환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의 우상이었던 슈테판 게오르그가 히틀러의 집권에 대해 막연했던 반면에, 슈타우펜베르크는 '제3 제국'이 그와 그의 형제들이 추구하던 게오르그의 '신제국'과는 다른 것임을 알아차렸다. 1942년 8월-독일 군대의 스탈린그라드 패배 이전에, 이미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의 전쟁이 '의미없는 범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의측근이었던 요아힘 쿤에 대한 러시아 심문자료가 이를 보여준다.역사가 페터 호프만이 얼마전 이 서류를 공개했다. 그것은 도덕적 분노와 실망의 기록이었다. 오랫동안 히틀러 암살은 스탈린그라드 진공을 결정한 '위대한 지도자'의 전략적 실수에 대항한 군대의 봉기로 간주되었었다. 그렇지만 1944년 쿤의 진술은 유대인 학살과 동부전선에서의 범죄 행위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슈타우펜베르크 무리의 동기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육군소장 헤닝 폰 트레스코브 주변의 저항세력에 접촉할 방법을 찾았고, 아프리카 부상 이후 일반 육군청으로 근무지를 옮기며 베를린으로 입성했다. 이곳에서 그는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던 이들의 추진축이 되었다. 이곳에서도 게오르그 청년 조직의 은밀한 비밀행동은 슈타우펜베르크 형제를 (암살조직과) 분리시켰다. 슈타우펜베르크 형제가 게오르그 조직과 접촉한 이후로 이 형제들과 세상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오직 게오르그의 사상에 동의하는 이들만이 통과할 수 있는")장벽이 형성되었다고, 호프만은 전기에 썼다. 그렇지만 7월20일 벙커 '볼프샨쩨'에서 슈타우펜베르크가 몰래 반입한 폭탄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그리고 같은 날 밤 슈타우펜베르크는 다른 공모자들과 함께 육군청 안뜰에서 처형되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흥행이) 보장된 작품처럼 보인다는 헐리우드의 소문은 그의 사후 기록의 놀라운 최고 정점이지만, 사실 이것은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독일인의 4분의 일이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을 반역자로 여겼다. 68세대 조차도 아주 일부만이 히틀러에 대항한 군부 세력에 관한 조사 작업을 시작했다: 반역자의 그룹 안에는 반유대주의자들과 과거 나치 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7월 20일의 주인공들에 관한 전설은 서독 정치권에서부터 정리되었다. 1946년 저항세력들의 가족에 대한 경제적 지원에 극렬하게 반대하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정확하게 암살기도 10주년이 되던 날, 7월 20일의 희생자들은 존중받고 존경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 이후로 7월 20일은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기념일은, 군역사학자 토비아스 바우의 말을 따르면 "외적으로는 총체적 책임론에 대한 반증으로, 내적으로는 '자유'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작용했고, 카를로 슈미트를 통해 슈타우펜베르크와 그의 동료들은 공식적으로 예수와 비슷한 구원자의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 "그들의 이마를 눌렀던, 가시관에 비유되는, 단단한 월계수가 우리를 짖누르던 책임을 가져가버렸다." 고 슈미트는 말했다. 전직 나치-해군 판사였던 한스 필빙어는 느닷없이 1974년 독일 대통령 재임당시, 군부 저항의 영웅들을 통해 "독일의 이름이 정화되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허풍쟁이들에 비하면 헐리우드 '발키리'의 각본은 이성적이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아들, 베르트홀트가 제작과정에 우려했던 '끔찍한 키치'의 흔적도 없다. 대신: 진지하고 책임감 있는 가장이자 장교로서의 슈타우펜베르크가 존재한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탄생한 한 영웅. 처음에는 히틀러를 제압해야 한다고 형이 그를 설득했었다:"누군가가 일어나서 세상에 알려야만 해. 우리 모두가 그와 같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야..." 하지만 영화 '발키리'의 주인공들도 무모한 호언이나 웅변조의 어휘를 빠뜨리지는 않는다. "Someone is watching over that son of a bitch"(누군가가 이 개자식을 보호하고 있군) 라고 공모자 헤닝 폰 트레스포브를 연기한 케네스 브래너는 영화 초반부,히틀러가 다시 한번 암살의 위기를 모면하자, 저주한다. 비슷한 말은 슈타우펜베르크의 입에서도 나온다, 1942년 한 동료에게, 히틀러 본부에 "그 돼지놈에게 총알을 박아넣을" 장교가 한명도 없는지를 물었을때.(우리말의 개만큼 큰 욕이 독일어에서는 돼지이다...)
"좀 숭고하게 들리지만," 니나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그녀의 남편에 대해 말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영웅적 삶을 살았습니다." 정말 용기있는 영웅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전설의 요소이고, 그것은 고전에서든 오늘날 극장에서든 다르지 않다.
* 작년 초였나...ZDF(독일 제2 공영 방송)에서 독일 방송사상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 100을 뽑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다.
독일도 이미 노령화 사회에 진입한지 오래라...베른 월드컵과 같이 아주 오래전의 일들이 10위권 안에 든 것이 재미있기는 해도 심하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외국인인 나의 눈에 가장 놀라웠던 것은...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베를린 방문 당시 "Ich bin ein Berliner(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라고 연설한 부분이 5위 내의 순위에 올라있는 것이었다...
자국도 아니고...외국 대통령 연설의 단 한마디를 근 반세기가 가까워져 가는 세월 동안 온 국민이 그 토록이나 감동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번 충격을 받았고...
케네디의 그 말 한마디가...교황의 축복이라도 되는 냥...감격에 겨워 흐느끼는 베를린 시민들을 자료 영상을 통해 보면서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더랬다...
케네디 딴에는 냉전의 절정기에 서독에서도 따로이 떨어져 섬과 같이 격리되어 있던 베를린 시민들을 격려하고자 하는 의도였겠지만...
2차 대전 종전 이후, 쥐죽은 듯 엎드려 20년 가까운 세월을 견디던 독일인들에게는...
당시 자유 진영의 수호국이었던 미국 대통령 케네디의 "Ich bin ein Berliner!!!" 이 말 한 마디가
그간 그들을 억눌러오던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면죄부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영웅만들기'는 이해는 되지만...한편으로는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치에 대한 슈타우펜베르크의 모순적 태도가...
'그의 지향점도 결국...히틀러와 조금 다른 버전의 초인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남기기 때문이다...
* 동영상에 달린 자막에 아주 큰 실수가 있다... 메르켈(Merkel)이 아니라 메르클레(Merckle)다...
앙엘라 메르켈(Angela Merkel)은 현재 독일 여성 총리이고 경제 사태 때문에 요즘 잠을 잘 못이룬다고는 하지만...그런대로 안녕하다...
UNTERNEHMER-SELBSTMORD
Merckle-Mitarbeiter fürchten um ihre Zukunft
Unmittelbar vor seinem Freitod hat Adolf Merckle noch wichtige Unterschriften geleistet, um den Verkauf von Ratiopharm zu ermöglichen. Bei seinen Mitarbeitern
mischen sich in die Trauer nun Angst und Trotz. Denn dem Konglomerat steht ein tiefgreifender Umbau bevor. Blaubeuren/Ulm - Die Büste in der Eingangshalle der Ratiopharm-Zentrale ist mit weißen Blütenblättern umstreut. Eine große Kerze steht vor dem tönernen Kopf des Firmenpatriarchen Adolf Merckle. Als Zeichen von Trauer will ein Mitarbeiter das Arrangement aber nicht verstanden wissen. Das sei immer so, lautet die knappe Antwort. Die Belegschaft des Pharmaunternehmens gibt sich verschlossen. Sprechen möchte keiner. Mit gesenktem Kopf eilen sie an der am Eingang aufgestellten Fernsehkamera vorbei.
Beobachtet von der Öffentlichkeit, demonstrieren Ratiopharm-Angestellten business as usual. "Hier wird gearbeitet, sicher", sagt ein Mitarbeiter, der gerade in die
Mittagspause geht. Er klingt verwundert. So erschütternd die Katastrophe auch sein mag, es wäre wahrscheinlich schon logistisch unmöglich gewesen, allen frei
zu geben.
Im Ratiopharm-Werk in Ulm blasse Gesichter
Als die Nachricht durch Deutschland ging, dass der Firmengründer des Generikaherstellers Adolf Merckle sich das Leben genommen hat, war im Ratiopharm-Werk
in Ulm wie überall im Land Feiertag. Heilige Drei Könige. An diesem Mittwoch geht das Geschäft am Hauptsitz bei Ulm - einen Tag nach der schockierenden
Nachricht - einfach weiter. Lastwagen stauen sich auf dem Gelände mit den riesigen grauen Hallen und den modernen Bürogebäuden. In der Mittagszeit können
Besucher am Anmeldetresen die Mitarbeiter beobachten, die hinter einer riesigen Glasfront in die Kantine strömen. Scheinbar wird geplaudert und gescherzt wie
immer.
Auch der Pressesprecher will nicht groß zitiert werden, er kommt auf Anfrage herbeigeeilt, blass, eine frisch gedruckte Pressemeldung in der Hand. "Mit größter
Bestürzung haben die Geschäftsführung und die Mitarbeiterinnen und Mitarbeiter der Ratiopharm Gruppe gestern vom Tod Adolf Merckles erfahren", steht da. Was
soll man auch sonst sagen? Wie es weitergeht? Das weiß auch von den Mitarbeitern wohl niemand so genau. Von der Geschäftsleitung erfahre man derzeit nicht
viel mehr, als ohnehin schon in der Presse stehe, sagt einer. "Ich weiß nicht mehr als Sie."
Trauer am Sitz der HeidelbergerCement
Nicht viel anders sieht es in Heidelberg aus, dem Sitz des zweiten Merckle-Schwergewichts HeidelbergerCement . Der aschgraue Betonblock mit dem grünen
Firmenlogo reckt sich in den stahlblauen Himmel. Die markanten Stein-Skulpturen vor der weitläufigen Anlage in der Berliner Straße sind schneebedeckt. Bei
arktischen Temperaturen von minus 15 Grad traut sich kaum jemand vor die Tür.
Hinter der Fassade ist es dagegen alles andere als ruhig. Alles dreht sich heute nur um ein Thema: "Sie können sich vorstellen, dass auf den Gängen und in den
Büros nur über den Tod von Herrn Merckle gesprochen wird", sagt ein Mitarbeiter. "Keiner weiß, was das nun für uns bedeutet." Die Mehrheit der Angestellten ist
betroffen. Der Familienunternehmer war beliebt am Neckar. "Dass der Einschlag im eigenen Haus passiert, damit rechnet man dann doch nicht", sagt eine Frau,
die hastig durch die eisige Kälte hinüber zur Kantine stapft. Sie schüttelt den Kopf: "Alle nehmen Anteil an dieser Tragödie."
Hinter den Kulissen bemühen sich derweil die Mitglieder des Familien-Clans fieberhaft um die Rettung des Lebenswerks ihres Vaters. Später am Tag verkündet der
Sprecher der Familienholding VEM, Detlev Samland, den Durchbruch. Die rund 30 Gläubigerbanken hätten bereits die nötigen Unterschriften für einen
Überbrückungskredit geleistet, erklärt er. Dadurch könne das Imperium mit insgesamt rund 100.000 Mitarbeitern kurzfristig vor der Insolvenz bewahrt werden. Jetzt
ist der Weg frei für einen Kredit von mehr als 400 Millionen Euro, um die klaffende Liquiditätslücke zu schließen.
Vor dem Freitod das Haus bestellt
Wie es aussieht, hat der Firmenpatriarch vor seinem Freitod das Haus bestellt. Alle Unterlagen und Anträge hatte er unterschrieben, bevor er sich das Leben
nahm. Ein brisantes Detail der Vereinbarung wird wenig später an diesem Tag bekannt. Merckle musste dem Verkauf von Ratiopharm zustimmen. "Um die
Finanzierungssituation der Gruppe nachhaltig neu zu strukturieren, sind die Familie Merckle und die Banken übereingekommen, den Generikahersteller Ratiopharm
zu veräußern", heißt es lapidar in einer Presseerklärung. Ein Treuhänder solle den Verkauf des Pharmaunternehmens begleiten.
Allerdings soll das Unternehmen "definitiv nicht in diesem Jahr" verkauft werden, berichtet die Nachrichtenagentur dpa unter Berufung auf Unternehmenskreise.
Dass es frühestens 2010 zu einem Verkauf komme, daran gebe es "wegen des derzeit schlechten Marktumfelds und weiterer firmeninterner Gründe keinerlei
Zweifel". Zwar würden viele Banken Ratiopharm am liebsten sehr schnell verkaufen, solange der Erlös ausreiche, um ihre Kredite abzudecken, heißt es. Die
Merckle-Gruppe werden den Pharma-Produzenten aber auf keinen Fall "verschleudern" und deshalb ein besseres Marktumfeld für den Verkauf abwarten.
Experten schätzen den Wert des Generikaherstellers auf zwei bis drei Milliarden Euro. Angesichts des großen Schuldenberges - in Presseberichten war von
Ausständen in Höhe von bis zu fünf Milliarden Euro die Rede - wird die Familie möglicherweise um weitere Schnitte nicht herumkommen.
Trotz und Wut bei Ratiopharm in Blaubeuren
Im Ratiopharm-Werk an Merckles Wohnsitz in Blaubeuren löst die Nachricht über einen bevorstehenden Verkauf Bestürzung aus. Trauer und Wut ist auf den
Gesichtern der Mitarbeiter zu erkennen, die das Werk am Nachmittag nach Schichtende verlassen. In die Trauer um den Patriarchen mischen sich nun
Zukunftsangst und auch Trotz. "Wir arbeiten hier ganz normal weiter", sagte eine Angestellte im Vorbeigehen.
Es bleibt nicht die letzte Hiobsbotschaft dieses Tages. Denn die Gläubiger haben auch durchgesetzt, dass der Merckle-Clan in dem Konglomerat an Einfluss
verliert. Adolf Merckles Sohn Ludwig werde sich aus der Gruppe zurückziehen, teilte die VEM mit. Nach dem Selbstmord des Firmenpatriarchen war sein Sohn
gemeinsam mit Ratiopharm-Finanzchefin Susanne Frieß Geschäftsführer der VEM.
Für die Sanierung der Unternehmen habe der Tod des Firmenlenkers keine Auswirkungen, fügte VEM-Sprecher Samland hinzu. Da Adolf Merckle in keinem
Unternehmen alleiniger Geschäftsführer gewesen sei, könnten die Geschäfte lückenlos fortgeführt werden. Seine Geschäftsanteile gingen an seine Kinder über.
Der Zeitpunkt für eine Trauerfeier war am Mittwoch noch unklar. Zuerst müsse die Staatsanwaltschaft die sterblichen Überreste freigeben, teilte die Familie mit. Die
Ulmer Ermittlungsbehörde hatte einen DNA-Test angeordnet, um letzte Zweifel an der Identität des Leichnams auszuräumen. Mit dem Ergebnis wird im Laufe
자살 직전에 아돌프 메르클레는 '라찌오팜'을 팔기 위해 중요한 싸인을 했다. 슬픔에 잠긴 직원들 사이에는 공포와 분노가 교차하고 있다. 기업이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블라우보이런, 울름, 라찌오팜 본사의 현관홀에 있는 흉상 앞은 애도의 꽃들로 가득하다. 커다란 초가 회사 경영주 아돌프 메르클레의 점토로 된 두상 앞에 놓여 있다. 애도의 표시로 한 직원이 둔 것이지만 알려지기는 원하지 않았다. '그런거죠...(?)'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 제약회사 전 직원이 경직되어 보였다. 그 누구도 이야기 하기를 원하지 않고, 모두들 고개를 떨구고 서둘러 현관에 설치된 방송국 카메라들을 스쳐지나갔다. 표면적으로 라찌오팜 직원들은 평상시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분명 여기서 계속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심 식사를 하러 가던 한 직원이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들렸다. 그렇게 이번 사태가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논리적으로 전직원이 일자리를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울름 '라찌오팜' 공장, 창백한 얼굴들 이 제약회사 창업자인 아돌프 메르클레가 자살했다는 보도가 독일 전역에 나갔을때, 울름에 위치한 라찌오팜 공장은 바덴뷔템베르크 주의 여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공휴일인 관계로 휴무 상태였다.(독일은 카톨릭과 기독교 주의 종교에 따라 공휴일이 조금씩 다른데...카톨릭 지역인 Baden-Wuertemberg는 1월 6일이 휴일이었다. 직역하면 '동방박사'의 날인데...우리말로는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수요일, 충격적인 소식의 다음날 울름에 위치한 본사는 평소와 같았다. 화물차들이 거대한 회색 (공장이나 창고)건물들과 모던한 사무실 주위에 늘어서 있었고, 점심시간에 방문자들은 안내카운터에서 (대형 유리 프론트뒤 직원 식당으로 사라지는) 직원들을 볼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소처럼 수다를 떨고, 농담을 건네는 것처럼 보였다. 언론대변인도 특별한 답변을 피한채, 질문들을 무시하고 서둘러 사라졌다. 그렇지만 창백하게, 손에는 "라찌오팜의 경영진과 직원들은 어제 아돌프 메르클레의 죽음을 경악했다."라고 갓 인쇄된 기사를 들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직원들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기업경영에 대해서도 언론에 한 관계자가 "저도 당신들 이상으로 알지 못합니다"라고 인터뷰한대로, 현재 그 누구도 더 이상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하이델베르크 시멘트' 본사의 슬픔 메르클레의 2번째 주요 계열사인 하이델베르크 시멘트의 본사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초록색 회사로고를 단 잿빛 콘크리트 블록이 검푸른 하늘 위로 솟아있다. 베를린가로 이어지는 회사 앞 유명한 석상은 눈으로 덮여 있다. 영하 15도의 혹한에 인적이 드물었다. 건물 안은 정반대로 전혀 고요하지 못했다. 오늘 하루 모든 것이 한 가지 주제에 쏠려 있었다: "복도에서 그리고 사무실에서 모두들 메르클레씨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는 것을, 당신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한 직원이 말했다. "누구도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다수의 직원들은 충격을 받았다. 이 가족기업(family-ownedenterprise)은 네카강 지역에서 사랑받아왔다. "이 집안이 추락하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칼바람을 헤치고 직원 식당으로 향하던 한 여성이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우리 모두가 이 비극을 공유하고 있다." 무대 뒤에서는 그동안 가족들이 아버지의 평생에 걸친 역작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집안 소유의 VEM의 대변인, 데틀레프 잠란트가 오늘 오후 발표했다. 그는 30여 개의 신용은행들이 이미 대체자금을 위해 필요한 결제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전체 10 만여명을 직원으로 구성된 이 제국은 당장 부도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급한 불을 끄기 위한 4억 유로 이상의 대출의 길이 열렸다. 자살 전 신변을 정리하다. 메르클레는 자살 전 신변을 정리했다. 모든 서류들에 결제를 했고, 충격적인 합의의 구체적 내용은 같은 날 공개되었다. 메르클레는 라찌오팜을 파는 데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재정 상황을 지속적으로 새로이 구축하기 위해서, 메르클레가와 은행들은 제약회사 라찌오팜을 파는 것에 결론을 모았다." 라고 간략하게 언론에 발표했다. 피신탁인이 회사를 매매하는데 참여할 것이다. 그렇지만 라찌오팜은 "절대 올해 안에" 팔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dpa 통신사는 보도했다. 빠르면 2010년에 매매가 될 것이라는 것은 "현재의 심각한 시장 상황과 기업내부의 이유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시 말해 많은 은행들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라찌오팜을 수익이 충족되는대로 가능하면 빨리 팔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메르클레 그룹은 라찌오팜을 어떤 경우에도 헐값에 넘기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매매를 위해 시장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제약회사의 가치를 2~30억 유로로 추정한다. 50억 유로에 달하는 미상환금이 있다고 언론에 보도된바 있는, 어마어마한 부채에 대해서는 가족들은 가능한한 계속 벌어지는 것을 피하지 않을 것이다.(?) 블라우보이런, 라찌오팜의 분노 블라우보이런 메르클레의 자택 근처, 라찌오팜 공장에는 다가올 매매에 관한 기사가 충격으로 공개되었다. 오후 근무를 마치고 공장을 떠나는 직원들의 얼굴에서 슬픔과 분노를 읽을 수가 있었다. 메르클레에 대한 슬픔 속에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분노가 섞여 있었다. "우리는 변함없이 평소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지나치던 한 직원이 이렇게 말했다. 이날의 마지막 나쁜 소식은 아직 남았다. 메르클레 일가는 이 회사에서 영향령을 잃었다. 아돌프 메르클레의 아들 루드비히는 그룹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VEM은 전했다. 사주의 자살이후 그의 아들이 라찌오팜의 경영책임인 수잔네 프리스와 함께 VEM의 최고 책임자였다. 기업 재정비에 회사지도자의 죽음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VEM 대변인 잠란트는 덧붙였다. 아돌프 메르클레가 어떤 회사에서도 단독 경영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업은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빈틈없이 유지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경영지분들은 그의 자식에게 상속되었다. 장례일은 아직 불확실하다. 먼저 검찰 측이 사체의 남은 부분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가족들은 전했다. 울름 수사청에서는 시체의 신원 의혹 확인을 위해 DNA 테스트를 했다. 결과는 이 주안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출처: 슈피겔
새해도 일주일 지났다...
새해 벽두부터 우울한 소식이 많다...
평생 쌓아 올린 것이 그렇게 한순간 사라지기도 하는...삶이 참...허무한 구석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