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어서 나는 그가 내 말을 듣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벌써 그렇게 해 봤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나는 그걸 해 봤고 지금은 그게 모두 내 머리 속에 있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혼자 몇 달 몇 년씩 살아 봤지... 일단 그러고 나면 평생 동안 그걸 절대로 잊지 못해. 나는 어디로도 갈 필요가 없어.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로 돌아가 있으니까. 거기가 요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야. 아무도 없는 곳 한가운데로 돌아가서...."
Wie viel kann schiefgehen bei einem großen Bauprojekt? Jede Menge, wie der In-Tempo-Doppelturm im spanischen Benidorm zeigt: Mit seinen
47 Stockwerken gerät der Luxustraum zur Lachnummer - die Architekten vergaßen den Einbau eines funktionierenden Aufzugs.
Er sollte der Stolz von Benidorm werden - und mit 47 Stockwerken und 188 Metern Höhe das höchste Wohngebäude der Europäischen Union: Als das Modell des
"Residencial In Tempo" nach drei Jahren Vorplanung im Januar 2006 vorgestellt wurde, dachte in Spanien noch niemand an eine Wirtschaftskrise. Die aber schlug
zu, kurz nachdem der Bau begann. Es ging nicht recht vorwärts und offenbar auch drunter und drüber, wie jetzt bekannt wurde: So vergaß der Architekt unter
anderem, für den Wolkenkratzer einen ausreichenden Aufzugschacht einzuplanen.
Verursacht wurde die nun bekannt gewordene peinliche Panne letztlich durch eine Mischung aus Gier und Inkompetenz. Ursprünglich war der "In Tempo" nur mit
20 Etagen geplant worden. Als der Auftraggeber nach mehr Mietern und Käufern verlangte, setzte der Architekt einfach 27 weitere oben drauf - nur eben, ohne an
einen passenden Fahrstuhlschacht und die dafür notwendige Hebetechnik zu denken. Das fiel nun angeblich erst rund 110 Baumeter später im Januar 2012 auf,
wurde aber bisher nicht öffentlich gemacht - es fällt schwer, das zu glauben.
Die bis zum 20. Stockwerk verbaute Aufzugtechnik war genau für diese Höhe ausgelegt. Als die Entscheidung zur Aufstockung kam, zog man den vorhandenen
Schacht zwar weiter, bedachte aber weder, dass mehr Stockwerke auch mehr Nutzung bedeuten würden, noch, dass das Raumangebot nicht für die durch die
zusätzliche Höhe notwendige Hebetechnik reichen würde. Die Spanier verbuchen das Bau-Desaster als nationale Schmach, als Fanal der Inkompetenz - wenn man
so will, ist es ihr BERlin.
Pannenserie produziere Mängel in Masse
Mit Ruhm bekleckert hatten sich die Bauherren aber auch vorher nicht. Immer wieder kam es zu geldlichen Engpässen, Streiks wegen teils über Monate nicht
gezahlter Löhne verzögerten den Bau.
Der begann schon langsam, weil mit nahezu altägyptischen Methoden gebaut wurde: Ein Lastenaufzug wurde erst installiert, nachdem die ersten 23 Stockwerke
hochgezogen waren - bis dahin war alles Kran- und Laufarbeit. Als der Lastenaufzug den Betrieb schließlich aufnahm, kollabierte er und verletzte 13 Arbeiter.
"In Tempo" produzierte eine unendliche Kette von Pannen und - wie ein nun durch die Zeitung "El País" öffentlich gemachter Bericht zeigte - auch von Mängeln.
Einen Schuldigen dafür zu finden, gestaltet sich schwierig. Finanziert wurde der Bau ursprünglich von der Bank Caixa Galicia, die 2009 in finanzielle
Schwierigkeiten geriet, 2010 zunächst mit Caixanova fusionierte und 2011 schließlich als NCG Banco verstaatlicht werden musste. Sie hat mit dem Bau heute
nichts mehr zu tun.
Ob und wie schnell der größte Mangel des fehlenden Aufzugschachtes, der die weitere Vermarktung wohl nicht unerheblich behindern dürfte, gelöst werden kann,
steht in den Sternen. Die naheliegende Möglichkeit dürfte ein Außenaufzug sein, was allerdings einen nicht unerheblichen Eingriff in das architektonische Konzept
des Luxusbaus wäre.
Inzwischen hat der verantwortliche Architekt die Segel gestrichen, und das Gebäude wurde von der Sociedad de Gestión de Activos de la Reestructuración
Bancaria übernommen. Die ist besser bekannt unter dem kurzen und knackigen Namen Sareb - es ist Spaniens "Bad Bank".
Offiziell heißt es weiterhin, das Gebäude solle nun bis Dezember dieses Jahres fertiggestellt werden, der Verkauf von Wohnungen gehe weiter. Allerdings, berichtet
die englische Zeitung "Daily Mail", wohl mit deutlichen Preisabschlägen. Klar, wenn man laufen muss.
대형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잘못될 수 있을까? 아주 많이, 스페인 베니돔에 템포 더블타워의 사례처럼. 47층이라는 숫자와 함께 호화빌딩에 대한 꿈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다. - 건축가가 작동하는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이 건물은 베니돔의 자랑이 될뻔했었다. 47층, 188미터 높이로 EU내 주거건물로는 최고를 기록하며: 2006년 1월 3년에 걸친 초기 설계 끝에 "템포의 주거"가 모델로 발표되었을때, 당시 스페인의 그 누구도 불경기를 예견하지 못했었다. 그렇지만 불경기는 공사 시작 직후에 닥쳤다. 공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실상 위로도 그리고 아래로도. 현재 알려진 바와 같이: 건축가가 수많은 다른 것들 외에, 고층 빌딩에 적합한 충분한 수의 엘리베이터 샤프트를 계획하는 것을 잊었다.
알려진 바로는 탐욕과 무능의 혼재가 문제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원래 이 건물은 20층으로 계획되었다. 건축주가 세입자와 구매자 수를 끌어올리기를 요구하면서, 건축가는 그대로 그 위에다 27층을 더 얹어버렸다. 적합한 엘리베이터 샤프트 크기와, 엘리베이터를 끌어올리기 위한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2012년 1월경, 거의 110미터 높이에서 이 문제를 깨달았고, 이제껏 함구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20층까지 지어진 엘리베이터 테크닉은 정확히 이 높이를 커버하는 것이었다. 층을 더 얹기로 결정했을 때, 기존의 샤프트를 그대로 연장했는데, 더 많은 층수가 더 많은 수요를 요구한다는 사실과, 샤프트 규모가 추가된 높이를 지원하는 테크닉 시설이 들어가기에 충분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스페인인들은 이 재앙과 같은 공사를 국가적 치욕, 무능의 상징으로 판정했다. - 이를테면, 이것은 그들의 베를린이다(?).
문제의 연속이 규모에 부족을 야기했다.
Mit Ruhm bekleckert hatten sich die Bauherren aber auch vorher nicht.. 공사비 부족이 반복되고, 수 달간 체불된 임금 때문에 파업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지체되었다.
문제는 이미 천천히 시작되었었다. 거의 고대 이집트 식에 맞먹는 방법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23층까지 올려진 다음에, 수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먼저 설치되었다. 23층까지는 크레인을 이용하거나 계단을 통해 작업했다. 수화물용 엘리베이터가 마침내 작동하자, 이 엘리베이터는 추락했고, 이 사고로 13명의 인부가 다쳤다.
이 건물은 끝없는 문제의 사슬을 풀어냈다 -신문 "El País"의 기사처럼. 대한 책임자를 따지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이 건물은 원래 카이사 갈리시아 은행이 자본을 댔는데, 이 은행은 2009년 재정위기를 맞았고, 2010년에 일단 카이사노바와 함께 병합되었고, 2011년 최종적으로 NCG 은행으로 국영화 되었다. 이 은행은 오늘날 더 이상 이 공사와 관계가 없다.
앞으로의 분양에 가장 큰 관건이 될, 부족한 엘리베이터 샤프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은 방안은 외부의 엘리베이터일 것이지만, 이는 호화로움을 지향했던 원래 설계 컨셉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그 사이 책임 건축가는 사임을 했고, 이 건물은 Sociedad de Gestión de Activos de la Reestructuración Bancaria가 인수했다. 이 회사는 속칭 약자 Sareb으로 더 잘 알려져 있고, 스페인의 '나쁜 은행'이다.
이 건물의 완공 시기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올해 12월로 알려져있고, 집들도 판매중이다. 그렇지만 영어권 신문 '데일리 메일'에 따르면, 가격이 급격히 떨어졌다고 한다. 뭐, 걸어가야면야...
에핑이 요구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계속 그에게서 떼어놓을 줄 알아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요구에 중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요구들을 나 자신이 원하는 어떤 심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결국 그 일에는 본래부터 잘못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밀한 의미로 따진다면 사물을 정확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은 바로 내가 가장 배우고 싶어했던 것을 배울 수 있는 그런 원칙이었다. 겸손함, 인내, 정확성. 나는 그 일을 단순히 하나의 의무로 생각하는 대신 일종의 정신적 훈련,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르는 훈련의 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보이는 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세상은 눈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입으로 내려가기 전에는 뜻이 통하게 할 수 없다. 나는 그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기 새작했고, 어떤 사물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해 얼마나 멀리 여행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그 거리는 6, 7 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와 손실이 생겨나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구에서 달까지의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에핑을 상대로 한 내 첫번째 시도는 흐릿한 배경을 스쳐가는 한심할 만큼 모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전부터 쭉 보아 왔는데, 그것들을 어떻게 다른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묻곤 했다. 소화전, 택시, 포장도로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런 것들은 내게 아주 익숙한 것이어서 나는 그것들을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의 가변성, 즉 그것들이 빛의 강도와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방식과 그것들의 모습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상황, 말하자면 그 옆을 지나치는 갑작스러운 돌풍, 이상한 반사 등에 의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중이었고 비록 벽을 구성하는 두 장의 벽돌이 아주 똑같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동일한 것일 수가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같은 벽돌이라도 절대로 같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대기와 추위와 더위의 영향을 받아 눈에 띄지 않게 부서지면서 마모되고 비바람을 맞아, 만일 누군가가 몇 세기에 걸쳐 관찰을 할 수 있다면 마침내는 사라져 버리고 만다. 모든 무생물은 분해되고 있었고, 모든 생물은 죽어가고 있었다. 격렬하고 열광적인 분자들의 운동, 물질들이 끊임없는 폭발과 충돌, 그리고 모든 사물의 표면 밑에서 끓어오르는 혼돈... 그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나는 언제나 머리가 욱신거렸다. 에핑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경고했던 것처럼 아무것도 당연시해서는 안되었다.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 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 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따.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처음에 했던 설명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혼자 있을 때면,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밤 동안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방안의 사물들을 둘러보며 그것을 조금이라도 더 잘 표현할 수 없을까 알아보려고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뉴욕으로 온 것은 1965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열여덟살이었는데, 처음 9개월 동안은 대학 기숙사에서 살았지만-컬럼비아 대학교에서는 시외 거주 신입생들이라면 누구나 구내에서 생활해야 했다- 그 기간이 끝나자 웨스트 112번가에 있는 아파트로 옮겨 갔다. 그 뒤로 내가 마침내는 최악의 상태로 전락할 때까지 3년 동안을 살았던 곳은 바로 그 아파트였다. 그러나 내게 닥쳤던 역경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라도 오래 버틴 것이 기적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1천 권이 넘는 책들과 함께 살았다. 그 책들은 원래 빅터 외삼촌 소유로, 그가 근 30년에 걸쳐 한 권 두 권 사 모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대학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그는 무슨 충동에서인지 헤어지는 선물로 내게 그 책들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사양을 하려고 별의별 애를 다 썼지만, 외삼촌은 다정다감하고 아낌없이 내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수중에는 너한테 줄 만한 돈이 없다. 또 충고도 한 마디 해줄 수 없고, 그러니 네가 이 책을 받아 준다면 기쁘겠구나."
나는 그 책들을 받기는 했지만 그 뒤로 1년 반 동안은 그 책들이 담겨 있는 상자를 하나도 풀지 않았다. 내 속생각은 그를 설득해서 책들을 다시 가져 가도록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때까지는 책들을 조금이라도 손상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상자들은 내게 아주 쓸모가 있었다. 112번가의 그 아파트에는 가구가 들여져 있지 않았는데, 나는 원하지도 않고 사들일 능력도 없는 물건에 돈을 낭비하기보다는, 그 상자들을 몇 개의 '상상적인 가구'들로 바꾸었다. 갖가지 크기의 상자들을 치수 별로 분류해서 여러 줄로 늘어놓은 다음, 그것들이 가구와 비슷한 형태가 될 때까지 이렇게 쌓아올렸다 저렇게 쌓아올렸다 하면서 하나씩하나씩 배열하는 그 일은 어찌 보면 조각 그림 맞추기 퀴즈를 푸는 것과 좀 비슷했다. 열여섯 개의 상자로 이루어진 한 세트는 매트리스 받침이 되었고, 열두 개로 다른 세트는 테이블, 일곱 개로 된 다른 몇 세트들은 의자, 두 개로 된 또 다른 세트는 침대 스탠드 받침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온 방안이 흐릿한 누런 색이어서 좀 단조롭기는 했지만, 나는 자신의 재간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친구들은 이런 짓을 좀 이상스러워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나를 괴짜로 보는 데 길이 들어 있었다.
"이 만족감을 한번 생각해봐. 침대로 기어들어가 19세기 미국 문학 위에서 꿈을 꾸게 된다는 걸 알았을 때의 만족감을, 음식 밑에 숨어있는 온전한 르네상스와 함께 식사를 하려고 자리에 앉는 즐거움을."
사실 나는 어느 책이 어느 상자에 들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얘기를 꾸며 내는 솜씨가 대단했고, 비록 그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내가 끌어다 붙인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내 상상적인 가구들은 1년 가까이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중략...
내가 빅터 삼촌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장례식을 치른 지 두 주일 뒤, 나는 되는 대로 책 상자를 하나 들어내어 칼로 조심스럽게 테이프를 찢고 그 안에 있는 책들을 모두 다 읽었다. 그 책들은 어떤 순서나 목적이라고는 없이 마구잡이로 한데 섞여 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소설과 희곡, 역사책과 여행기, 체스 입문서와 탐정 소설, 공상 과학 소설과 철학 서적이 뒤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출판물의 완벽한 혼돈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하나하나의 책을 끝까지 다 읽었을 뿐 거기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하나의 책은 다른 모든 책들과 똑같았고, 하나하나의 문장은 똑같이 옳은 숫자의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하나하나의 단어는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내가 외삼촌을 애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하나씩하나씩 나는 모든 상자를 열어 한권씩 한권씩 모든 책을 다 읽었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설정한 과업이었고, 맨 마지막까지 나는 그 일에 매달렸다.
각각의 상자는 첫번째 것과 비슷하게 뒤범벅이어서 격이 높은 것과 낮은 것이 뒤죽박죽 섞여 있고, 클래식 작품들 사이에 한번 읽고 버릴 책들이 흩어져 있고, 양장본들 사이에
너덜너덜한 페이퍼백들이 끼여 있고, 던과 톨스토이 같은 작가들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잔뜩 채워져 있었다. 빅터 삼촌은 자기의 서재를 체계적인 방법으로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책을 새로 살 때마다 그 책을 전번에 샀던 책 옆에다 세워 놓았고,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조금씩 장서가 늘어 점점 더 많은 공간을 채우게 되었다. 책들이 상자 속으로 들어간 순서도 정확히 그런 식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대순 배열은 깨어지지 않고 원래의 상태로 보존 되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적인 배열 같았다. 하나하나의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외삼촌이 살았던 삶의 또 다른 부분, 어떤 정해진 날이나 주일 또는 달이라는 기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한때 외삼촌이 차지했던 걳과 똑같은 정신적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같은 글을 일고,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살고, 어쩌면 그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탐험가의 옛 행로를 따라 그가 전인미답의 영토로 헤치고 들어갔듯이 그의 발자취를 답습하며 태양과 더불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 마침내는 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 빛을 쫓아가는 것과도 같았다. 상자에는 번호가 적히지도 않았고 쪽지가 붙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느 시기로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미리 알 길이 없었다. 따라서 그 여행은 분리되고 이어지지 않은 유람 여행, 말하자면 보스턴에서 레녹스로, 미니애폴리스에서 수 폭포로, 케노샤에서 솔트레이크 시티로 건너뛰는 식이었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지도 위를 이리저리 뛰어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공백이 채워지고, 모든 거리가 주파될 것이었다.
그 가운데 많은 책들은 전에 읽은 것들이었고, 또 어떤 책들은 빅터 삼촌이 큰소리로 읽어 준 것들이었다. 로빈슨 크루소, 지킬박사와 하이드, 투명인간. 그러나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전에 읽었던 책들도 새로 읽는 책들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게걸스럽게 흡수하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차근차근 읽어 나갔다. 다 읽은 책 더미들이 방 귀퉁이에 탑처럼 쌓여 올라갔고, 나는 그런 탑들 가운데 하나가 무너질 것처럼 보일 때마다 읽고 난 책들을 두 개의 쇼핑 백에 담아서 다음 번 등교길에 들고 나가 팔곤 했다. 캠퍼스 바로 맞은편의 큰길에는 중고 책들을 주로 거래하던 비좁고 먼지가 켜켜이 쌓인 챈들러 서점이라는 책방이 있었다. 1967년 여름부터 1969년 여름 사이에 나는 그곳을 열 번 남짓 찾아갔는데, 그러면서 조금씩조금씩 내가 물려받은 책들을 없애버렸다. 그것이, 내 수중에 있는 것들을 이용하자는 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허용한 단 한가지 행위였다. 나는 빅터 삼촌의 소유물이었던 것들을 팔아 치우는 행위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외삼촌이 내가 그러지 못하도록 막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음
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진 빚을 갚았고, 이제는 돈이 너무 궁해진 만큼 다음 단계를 밟아 책을 현찰로 바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였다.
문제는 제 값을 받고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챈들러는 값을 몹시 박하게 매겼을 뿐더러, 책을 이해하는 태도도 나와는 전혀 딴판이어서 나는 그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나에게는 책이란 글을 담는 용기라기보다는 글 그 자체였으므로 어떤 주어진 책의 가치는 물질적인 상태보다 정신적인 질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래서 귀퉁이가 접힌 호메로스의 책이 번질번질한 버르길리우스의 책보다 더 나았고, 파스칼의 저서 한 권이 데카르트의 저서 세 권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나에게는 그것이 본질적인 구분이었지만 챈들러에게는 그런 구분이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책이 물건, 사물의 세계에 속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따라서 구두 상자나 변기 청소기나 커피 포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내가 빅터 삼촌의 장서 가운데 일부를 가져갈 때마다 그 늙은이는 경멸스럽게 책들을 만지작거리고, 책 등을 훑어보고, 때가 묻었나 흠집은 없나 살펴보면서 내게 자기가 쓰레기 더미를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챈들러가 게임을 해 나가는 방식이었다- 물건의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최저가를 제시하는 것. 헌 책 장수로 30년 동안이나 닳고 닳은 그는 얕잡아 보는 표정을 짓고, 못마땅한 것처럼 구시렁거리고, 이마를 찌푸리고, 혀를 차고,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젓고 하는 짓을 두루 써먹었다. 그런 행동은 내가 나 자신의 판단을 무가치하게 느끼도록, 그런 책들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 짓인지를 알아차리고 부끄러워하도록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네, 나한테 이 따위 것들을 가져와서 돈을 받아가겠다는 건가? 자네, 쓰레기를 치워가는 청소부한테서 돈을 받으려고 드는 건가?
나는 내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간해서는 반박을 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국 내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었을까? 챈들러는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를 했고 아무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팔려고 애를 쓴 반면, 그는 언제나 사는 데 무관심했으니까. 또 내가 파는 데 무관심한 척을 해 본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간단히 말해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팔지 못하는 것은 결국 속는 것보다도 더 안좋았다. 나는 책을 조금씩, 그러니까 한번에 열두 권이나 열다섯 권 이하로 가져가는 경우에 사정이 좀 나아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마다 권당 평균 가격이 약간씩은 더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래량이 적으면 적을수록 좀더 자주 그곳을 찾아가야 했는데, 나는 거래 횟수를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내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결국은 챈들러가 이기도록 되어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 늙은이는 아예 말을 걸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아는 척을 하거나 미소를 지어 보이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거래를 끝낸 뒤에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그의 태도가 너무 멍해서 나는 때때로 그가 나를 전번에 찾아왔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챈들러 편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책방으로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고객-공통점이라고 없는 낯선 사람들 중의 하나, 무작위의 뜨내기-이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 책들을 팔아치우는 동안 내 아파트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의 상자를 열면 동시에 하나의 가구를 파손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침대는 해체되었고, 의자들은 줄어들어 사라졌고, 책상은 텅 빈 공간으로 위축되었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커져가는 제로가 되었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손에 잡힐 듯 갑자기 생겨나는 빈자리뿐이었다. 내가 외삼촌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실직적인 결과, 현실 세계에서의 영향이 생겨났다. 따라서 그 결과는 언제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것을 피해 갈 길이라고는 없었다.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남겨졌고, 너무도 많은 상자들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 방을 둘러보기만 하면 되었다. 말하자면 그 방은 나의 상태를 측정하는, 얼마나 많은 내가 남아 있으며 얼마나 많은 내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는 지를 측정하는 기구인 셈이었다. 나는 나 하나만의 극장에서 범인이자 증인, 배우이자 관객이었다. 나는 나 자신의 절단 과정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한조각 한조각씩, 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0. 무심코 집어들어...4년만에 다시 읽은 책...
지독한 문학적 건망증을 확인하다...
치기 어린 포그의 이야기와 사악하지만 흡입력있는 에핑의 이야기에 비해...
바버와의 이야기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기억이 날 만큼...어렴풋하다...
4년 전 처음 읽고 난 뒤의 감흥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4년 후 다시 읽고 난 후... 이제껏 읽은 폴 오스터의 글 중 제일 재미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In Nordkorea gibt es kaum genug zu essen, doch Jungdiktator Kim plant ein „Bräuhaus“
Nordkoreas Bubi-Diktator Kim Jong-un (30) hat eine neue Idee, um das Leben in seinem isolierten Steinzeitreich, nun ja, erträglicher zu machen. Er plant einen
BIERGARTEN – wahrlich brillant...
Das kühle Blonde soll aus Deutschland kommen. Kim hat sogar schon bei der „Paulaner“-Brauerei nachgefragt! Die Münchner haben eine Anfrage bekommen, in
Nordkorea ein „Bräuhaus“ zu eröffnen, bestätigte Pressesprecherin Birgit Zacher BILD.de.
Absage! Kein Bier für Kim
ABER: Zacher hat schlechte Nachrichten für Kim: „Wir haben abgelehnt.“
Die Brauerei plant aktuell bereits zwölf neue Standorte. Ihre Kapazität sei damit ausgelastet. Paulaner-Sprecherin Zacher zu BILD.de: „Wir eröffnen im August unser erstes 'Bräuhaus' in den USA und haben zwei neue Standorte in St. Petersburg und Moskau. Über Nordkorea denken wir gar nicht nach.“
Vielleicht möchte sich der Brauerei-Riese aber auch einfach künftigen Ärger mit dem Jung-Diktator ersparen.
Immerhin betreibt Paulaner in anderen Ländern seine „Bräuhäuser“ sehr erfolgreich. Insgesamt 21 Biertempel sorgen in Asien für Umsatz.
Keine Reaktion aus Nordkorea
Und Kim? Der outet sich damit also als Bier-Liebhaber. Sein Vater Kim Jong-il († 70) liebte französischen Cognac. Wie sehr die Absage aus München den Bubi-Diktator getroffen hat, bleibt offen. Nordkorea will sich zu der irren Anfrage nicht äußern.
Unklar auch, was Kim sich bei seinem jüngsten Geniestreich gedacht hat, denn während es sich der Jung-Diktator gut gehen lässt, hat Norkoreas Bevölkerung kaum genug zu essen.
Der Mensch lebt nicht vom Brot allein, aber Bier allein füllt auch keinen Magen.
'Romeo und Julia' klar. 'Schwanensee' und der 'Nussknacker' natürlich. Aber ein Jugendroman als Ballett?
Passt. Mit der choreographischen Umsetzung des Klassikers von Otfried Preußler (1923-2013) „Krabat“ hat das renommierte Stuttgarter Ballett erstmals in seiner
Geschichte ein Jugendbuch abendfüllend auf die Bühne gebracht. Der Lohn: Begeisterung und ganz viel Applaus des Premierenpublikums im ausverkauften
Opernhaus – nicht nur für tänzerische Meisterleistungen.
Duster ist das Ganze. Muss es aber auch sein – denn Preußler hat es ja genau so gemeint. Hunderte, meterhoch aufgestapelte Mehlsäcke wirken als Kulisse
erdrückend. Es geht um Macht, schwarze Magie und Liebe – und um den Kampf zwischen diesen beiden Kräften in einem jungen Mann. „Ich finde es sehr wichtig,
diese Geschichte am Leben zu erhalten“, sagt der junge deutsch-argentinische Tänzer und Choreograph Demis Volpi, der Preußlers Vorlage in Tanz umdichtete.
Die Geschichte sei „aktuell und universell“.
Preußlers Roman erzählt vom Waisenjungen Krabat. Er wird in einer Mühle als Geselle aufgenommen – doch der Meister der Mühle (Marijn Rademaker) offenbart
ihm bald, dass er sich eigentlich in einer „Schwarzen Schule“ befindet, in der er die „Kunst der Künste“ lernen kann. Anfangs fasziniert von der Macht der Magie,
erkennt Krabat, dass er einen furchtbaren Preis bezahlen muss: Er ist Gefangener des Meisters.
„Es geht ja im Prinzip um einen Jungen, der sich in die falsche Gesellschaft begibt und dort zunächst den Verlockungen der Macht erliegt“, erzählt Volpi. Als
Krabat realisiert, was ihm geschieht, ist es schon fast zu spät. „Aber durch die Kraft der Liebe kann er sich und seine Mitmenschen retten.“
Katharina Schlipf hat für „Krabat“ ein atmosphärisches Bühnenbild sowie schlichte, aber hoch wirkungsvolle Kostüme geschaffen. Die spektakulärsten tragen die
Gesellen, wenn sie der Meister in Raben verwandelt. Das symbolisiert ihre Abhängigkeit vom Meister und seiner Mühle, denen sie trotz ihrer Flügel nicht
entkommen können.
Die zu jeder Zeit passende Musik, gespielt vom Staatsorchester unter der Leitung von James Tuggle, stellte Volpi aus Werken der drei zeitgenössischen
Komponisten Peteris Vasks, Philip Glass und Krzysztof Penderecki zusammen. Und der Clou: Um die monotone Arbeit der Gesellen in der Mühle des Meisters zu
illustrieren wurde eine spezielle „Mühlen-Musik“ komponiert – aufgenommen in der seit 1819 betriebenen Mäulesmühle im Siebenmühlental nahe Stuttgart.
Tontechniker zeichneten die Geräusche der arbeitenden, durch Wasser angetriebenen Mühle an 16 verschiedenen Stellen auf und bastelten einen beklemmenden
Surround-Sound für das Opernhaus.
Demis Volpi wurde in Buenos Aires geboren. Der Absolvent der John Cranko Schule kam in der Spielzeit 2004/05 als Eleve ans Stuttgarter Ballett. Seit 2006
'로미오와 줄리엣' 당연하다. '백조의 호수', '호두까끼 인형' 역시 당연하다. 그렇지만 청소년 소설을 발레로?
어울린다. 유명한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은 오트프리드 프로이슬러(1923-2013)의 고전 '크라바트'를 안무로 옮겨 처음으로 청소년소설을 장편으로 무대에 올렸다. 결과: 매진된 오페라하우스 내 관객들의 감동과 환호. 이는 훌륭한 춤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황량하다. 프로이슬로의 의도대로 정확히 그러함이 틀림없다. 수백개의 높이 쌓아올려진 밀가마니들은 무대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권력과 흑마술, 사랑, 그리고 한 청년이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살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젊은 독일계 아르헨티나인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데미스 볼피가 말했다. 그가 프로이슬러의 이야기를 춤으로 옮겼다. 이 이야기는 '현재에도 유효하고 전세계를 관통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프로이슬러의 소설은 고아 소년 크라바트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어느 방앗간에 일꾼으로 뽑히는데, 얼마가지 않아 이 방앗간의 주인(마진 라데마커 연기)은 크라바트에게, 사실 그가 '어둠의 학교'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마법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고 알려준다. 처음에 마법의 힘에 매료되었던 크라바트는 곧 그에 끔찍한 댓가를 지불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그는 마법사의 포로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한 소년이 잘못된 사회에 휩쓸려 들어가서, 처음에는 그 힘에 매료되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볼피는 말했다. 크라바트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거의 한발 늦었다.'그렇지만 사랑의 힘으로 그는 스스로와 그의 동료들을 구할 수 있었죠.'
카타리나 쉴프는 '크라바트'를 위해 인상적인 무대와 간결하지만 효과적인 의상을 디자인했다. 마법사가 소년들을 까마귀로 변신시킬 때, 그들의 의상(날개)이 가장 인상적이다. 이는 그들이 마법사와 이 방앗간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날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임스 터글의 지휘로 주립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언제든지 어울릴 듯한 음악은 볼피가 세 현대 작곡가 페테리스 바스크, 필립 글라스 그리고 크시슈토크 펜데레스키의 곡들 중에서 고른 것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마법사의 방앗간에서 소년들이 하는 단조로운 일을 형상화하기 위해서 특별한 '방앗간 음악'을 작곡했다. 슈트트가르트 근처 지벤뮐렌탈(일곱개 방앗간 계곡)에 1819년부터 작동 중인 모일렌스방안간의 소리를 녹음했다. 음향기술자는 현재도 작동하는 물로 돌아가는 방앗간의 소리를 16개의 다양한 위치에서 녹음해서, 짓누르는 듯한 소리를 오페라하우스를 위해 재구성해냈다.
데미스 볼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존 크랑코 발레스쿨의 졸업생인 그는 2004/05년 시즌에 학생자격으로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했고, 2006년부터 안무가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출처: 포쿠스. 2013년 3월 28일
초연 당시 공연이 끝나고 난 뒤의 사진인 듯하다...
무대 한 가운데가 안무가 데미스 볼피...
왼쪽의 한쌍이 보르슐라와 톤다를 연기한 알리샤 아마트리안과 알렉산더 존스...
지휘자 양쪽으로 주인공 한쌍 칸토르카와 크라바트를 연기한 엘리사 바데네스와 데이비드 무어...